와인의 대명사, 키안티
이탈리아 와인의 전통적 명산지는 피렌체가 있는 중부의 토스카나와 토리노가 있는 북부의 피에몬테 지방이다.
토스카나 지역의 키안티는 한국에 와인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외국에 나갔다 오는 사람들이 신기해서 사가지고 오던, 밑동을 짚으로 싼 호리병 같은 와인병으로 인상 깊다.
아쉽게도 이제는 인건비 등 원가가 너무 비싸서 일반 병에 담아 유통하지만 말이다.
토마토 파스타와 마치 한 몸인 듯 잘 어울리는 이탈리아 국민 와인 키안티는 상큼한 맛을 주기 위해 청포도를 20퍼센트 정도 섞는 것이 전통이자 법적 규제였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이탈리아 내에서는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프랑스 고급 와인은 발뒤꿈치도 쫓아가기 어려웠다.
중세 때부터 상업으로 이름 높았던 피렌체나 피사의 후예답게 토스카나는 과감히 국제적으로 마음을 열고 혁신을 시도했다.
결국 토스카나의 600년 된 유서 깊은 포도주 가문 안티노리는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만큼 품질을 높이겠다는 신념으로 토착 품종에 안주하지 않고 잘 나가는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등을 들여와 이탈리아 버전으로 멋지게 키워냈다.
물론 보수적인 이탈리아 정부는 전통을 어기고 외국 품종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 와인에 등급을 주지 않고 막술인 테이블 와인급으로 분류해 버렸다.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혀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아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소문은 금방 퍼져 값이 엄청 뛰었고 이 와인은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이라는 멋진 이름을 달고
세계적인 와인이 되었다.
마침내 이탈리아 정부도 고집을 꺾고 90년대 중반에 이 와인의 급을 DOC로 올려주었다.
역동적인 토스카나와는 달리 피에몬테는 알프스 발치에 프랑스, 스위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중세시대부터 강대국에 수없이 침략을 당했던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일종의 피해의식이랄까?
포도주에 있어서도 보수적인 면이 강해서 외국 품종에는 배타적인 성향이 있었다.
제조방식도 토스카나처럼 현대적인 양조기법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는 포도원이 많다.
이탈리아 정부가 최상급 등급인 DOCG를 도입할 때 처음으로 이 지역의 바롤로(Barolo, "와인의 왕'이라 불리는 묵직한 장기 숙성 와인)에 주었을 정도로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와인을 생산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와인들은 명성에 비해 아직 품질에 편차가 있다.
현대적인 양조법을 택한 포도원도 있지만 전통을 고집하는 작은 포도원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바롤로가 남성적이면서 진하고 무거운 와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대적인 양조기법을 도입한 바롤로가 주로 수입되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평론가들의 입맛을 겨냥하는 현대적인 양조법은 첫맛이 유혹적이지만 개성이나 인간적인 매력은 떨어진다.
외국 평론가들에게 점수를 얻으려는 것 때문에 와인의 맛이 평준화된다고 불평하는 애호가들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적인 양조법으로 생산된 것은 어쩌면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와인에 길들여진 우리의 입맛에 맞는 맛을 구현한 것일 수도 있다.
조미료와 부재료가 잔뜩 들어간 공장 된장에 익숙해진 우리 입맛에 할머니가 손으로 만들어준 된장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과도 같다.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 시에나에서 25킬로미터 근처의 카스텔리나인 키안티는 토스카나 지역 중에서도 키안티 클라시코를 생산하는 심장부다.
해발고도 350~500미터의 아름다운 언덕이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에 포도와 올리브나무들이 가득하고, 그 사이로 빛바랜 벽화처럼 고색창연한 마을들이 한적하게 보인다.
키안티 클라시코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지역적 규제뿐 아니라 엄격한 생산법규까지 지켜야 한다.
키안티 와인 중에서도 키안티 클라시코에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생산법규가 존재한다.
토스카나의 토종 품종인 산지오베제 80퍼센트 이상, 물론 100퍼센트도 상관없다.
나머지는 이 지역의 다른 포도 품종인 카나이올로나 콜로리노
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멜로 등을 넣을 수 있다.
알코올 도수는 최소 12도, 오크통에서 좀 더 오래 숙성하는 리저브레는 12.5도가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는 심은 지 4년 이상이 지난 것에서부터 수확할 수 있고, 1헥타르당 수확할 수 있는 포도의 무게와 만들 수 있는 포도주의 양도 엄격히 정해져 있어 재배 단계에서부터 관리한다.
즉 포도 알갱이 안에 키안티 클라시코의 맛과 향을 내는 성분들이 충분히 포함되도록 하기 위해 포도나무 한 그루에 열릴 수 있는 포도의 양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리저브는 24개월 이상 숙성시킨다. 이렇게 만들면 아름다운 루비빛에 살짝 타닌의 떫은맛과 산도가 어우러진 키안티 클라시코가 생산된다.
키안티를 만들어내는 산지오베제 품종은 토스카나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로 외부 요인에 매우 민감해서 이탈리아인들은 산지오베제만큼 토양의 영향을 받고, 토양의 냄새를 확실히 와인에 전해주는 품종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이탈리아 중부의 석회질과 화산토가 섞인 땅에서만 야생적인 풀 향기와 담배 향을 머금은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산지오베제는 은은한 제비꽃 향을 머금고 있다.
정말 시골 촌부의 미소처럼 미미해 '수줍다'는 표현밖에는 할 수 없는데, 그 숨어 있음에도 자신을 드러냄이 그야말로 이탈리아적이다.
키안티 클라시코 컨소시엄의 상징은 검은 수탉인 갈로 네로(Gallo Nero)인데, 중세 도시 국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설을 담고 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던 시대에 이탈리아는 수많은 도시 국가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당연히 토스카나에서 서로 이웃하고 있는 피렌체와 시에나도 영토분쟁으로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이고 시민들이고 너무 피폐해져 가자 피렌체는 시에나에 이렇게 싸울 것이 아니라 영토경계선을 정하자고 제안하였다.
시에나도 마찬가지로 힘들어하고 있었던 지라 이 제의에 동의하였다.
그럼 어떻게 국경을 나눌 것인가?
고심 끝에 피렌체와 시에나의 성문에서 기사가 출발하여 두 기사가 만나는 지점을 경계선으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긴다.
출발 시점은 어떻게 잡은 걸까?
당시 새벽에 닭이 우는 것을 출발 신호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일찍 출발해 조금이라도 멀리 달려가 먼저 깃발을 꽂는 자가 땅을 많이 가질 테니 시에나와 피렌체는 닭이 잘 울도록 신경을 썼다.
그래서 시에나는 도시에서 가장 튼튼하고 목소리가 큰 흰 닭을 골라 다음날 아침 힘차게 울라고 모이를 잔뜩 주었다.
피렌체는 작고 탄탄한 검은 닭을 골라 저녁을 굶겼다.
결과는?
피렌체의 검은 닭이 배가 고파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울며 설치는 바람에 기사가 일찍 출발하여 멀리까지 갈 수 있었던 반면에, 시에나의 흰 수탉은 배가 불러 게을러진 탓에 늦잠을 자서 기사가 늦게 떠나게 되었다.
두 기사는 시에나에서 십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폰테루톨리에서 만났다.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 기사가 달렸던 길 주변이 바로 키안티 와인을 최초로 생산하던 지역으로
대부분이 피렌체의 영토가 되었다.
결국 검은 수탉은 키안티의 상징이 되었고,
조르조 바사리는 피렌체의 베키오 궁 500인홀 천장에 검은 수탉을 그려 넣었다.
키안티 와인의 명성은 이때부터 유명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주변 여기저기에서 짝퉁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1716년, 코시모 3세는 키안티를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의 한계를 처음으로 정하기도 했다.
지금은 키안티 와인의 생산지가 많이 넓어졌지만,
바로 이 처음의 원조격인 지역을 키안티 중에서도 클라시코라 하며 검은 수탉의 상징을 붙인다.
키안티 클라시코를 생산하는 원조 지역 한가운데 와인의 명가 카스텔라레 포도원이 있다.
햇빛과 물 빠짐. 언덕의 높이, 토양,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키안티의 노른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