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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와인(4)

그라파(신이 만든 증류주)

by 산내

어디서나 포도주가 생산되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라파는 여러 세대를 거쳐 전해져 온 독주이다.

이 독특한 술은 농가에서 포도주를 만들고 나서 남은 찌꺼기를 모아 증류시킨 이탈리아 토속주이다.


포도주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생산되지만 그라파는 그 도수가 높아 주로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만든다.

독일과 스위스 국경 지역의 알프스 산기슭에서는 등산객들이 많이 마셔서 몬테 그라파라고도 했다.


그라파는 여러 세기 동안 담백하면서도 강하고, 기분을 돋우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지녀왔다.

피에몬테 같이 추운 북부 지방에서는 구운 생선의 소스 등에 넣기도 하고, 치즈가 숙성되는 동안 겉에 바르기도 한다.

디저트나 비스킷과도 잘 어울리고, 초콜릿 속에 넣기도 한다.


그라파를 사용한 칵테일 줄렙은 그라파에 민트와 설탕, 얼음을 넣거나 그라파와 스파클링 포도주인 프로세코를 섞어 여기에 자몽주스를 첨가하기도 한다.

마지막 버전은 많이 마시면 완전히 취해버릴 수 있는 칵테일이다.


그라파는 전 세계의 다양한 술 중에서도 독특하다.

현대 우리가 알고 있는 증류주들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증류주들은 액체의 술을 증류하여 얻는 데 비해, 그라파는 고체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막걸리를 만들고 나면 찌끼미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도를 압착해서

포도주를 만들고 나면 껍질, 씨, 잔가지 등이 남는데 이를 '비나키아’(Vinaccia)라고 한다.

요즘은 이것으로 화장품도 만들고 포도씨유도 짜지만, 옛날에는 그라파를 만들었다.

커다란 찜통에 넣고 열을 가해 찌는데, 물이나 다른 성분을 첨가해서는 안 되며 오직 포도 찌꺼기만을 사용한다.


당연 그라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껍질 부분이다.

껍질 속의 성분이 그라파의 중요한 향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포도 찌끼미가 상하거나 곰팡이가 끼지 않도록 신선도를 유지하여 최단 시간 내에 증류하는 것이

그라파의 품질을 결정한다.

포도주 100병을 만들고 남은 찌끼로 간신히 그라파 한 병이 나온다니 참으로 막술치고는 귀한 술이다.


추출된 맨 처음 그라파는 알코올 농도가 65~85퍼센트에 이르는데,

생산자의 선택에 따라 알코올 도수를 정해 증류수로 희석하게 된다.

법적으로 37.5퍼센트보다 낮아서는 안 되며 유럽연합의 원산지보호를 받으려면 40도가 되어야 하는데,

증류한 액체에 녹아 있는 방향 성분과 균형이 맞는 도수를 정하게 된다.

즉 알코올 도수가 너무 타는 듯해도 안 되고, 향을 가려도 안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라파를 만드는 증류 장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증류주는 나라마다 많이 나는 재료로 만든 술을 증류하며 발전하였다.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생산하는 나라는 코냑을,

옥수수나 보리가 많이 나서 맥주를 생산하는 나라는 위스키를,

쌀로 술을 만드는 동양은 소주나 고량주를 증류한다.

코냑의 일종인 그라파는 14~15세기의 문헌에서부터 언급되고 있지만, 대중적인 술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포도주가 자리 잡아가던 1960년대,

그라파 만들기에도 기계화가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의 단식 증류 방식이 아닌 연속 증류 방식이었다. 과거 장인들이 하던 증류는 비연속 증류로 요즘의 산업적인 연속 증류와는 달랐다.

그러다 보니 장인들이 소규모로 만드는 그라파는 가격 경쟁이 되지 않아

타격을 입은 장인들의 양조장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20세기 초에는 수천 개 정도의 양조장이 있었지만 현재 남은 곳은 90개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도 예전에 중국처럼 50~60도까지 가던 것이 현재는 40도 내외로 떨어졌다.



다른 술과 달리 그라파는 그 복잡하고 오묘한 향을 표현하는 데 애를 먹게 된다.

보통 디저트로 마시는데, 전용 잔에 소량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이 그라파의 향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다. 잔의 형태가 아주 중요한데, 튤립 모양의 작고 투명한 크리스털 잔을 주로 쓴다.

잔이 튤립 형태인 것은 향이 흩어지지 않도록 입구를 조여주기 위한 것이다.


숙성하지 않은 그라파는 8~10도, 오래 숙성한 그라파일수록 온도가 올라가 15~18도 사이에서 시음한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낮은 온도로 내려 마시는 것이 좋은데,

낮으면 손바닥으로 잔을 잡아 데워가며 마시면 되지만 높은 온도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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