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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06. 2021

유라시아 견문 3(2)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보스니아 사라예보>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면서 발칸이 ‘유럽의 화약고’로 전략했다.
 그중에서도 보스니아는 화약고의 총성이 가장 먼저 울리고 가장 격한 곳이었다.
 1908년 보스니아는 합스부르크에 병합되었다.
 보스니아 사람들은 오스만도 합스부르크도 아닌 독립국가를 염원했다.


1914년 6월 마지막 주,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이 된 기차를 타고

빈에서 사라예보로 시찰을 나온 황태자 부부는

라틴다리에서 ‘청년 보스니아’ 소속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탄에 쓰러졌다.


 마침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고

부인의 뱃속에는 합스부르크의 다음 대를 이어갈 태아도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생명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순간이기도 했다.


 암살의 배후로 이웃나라 세르비아를 지목했고,

막후 실세로는 러시아를 겨냥했다.


1992년 3월 1일 라틴다리에서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보스니아의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가 실시되는 날,

세르비아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고 세르비아 국기를 휘날리며 카 퍼레이드를 펼쳤다.


 보스니아인의 시각에서는 심기를 거스르는 도발적인 행동으로 보였고,

 결혼식 참가자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했다.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유고연방군은 세르비아인 보호를 구실로 사라예보로 진격했다.


 이 보스니아 내전이 유독 격렬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사라예보가 다 문명 세계였기 때문이다.

 1990년 당시에도 4: 3: 2의 황금비율을 지속했다.
 무슬림이 4할, 정교가 3할, 가톨릭이 2할, 나머지 1할은 유대인이나 집시, 공산주의자였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유고 연방이 붕괴하면서 잘난 사람만 더 잘 나가는 격차 사회가 도래하고 말았다.
 이웃은 더 이상 동무가 아니었고,

동료들 또한 동지가 아니었다.
 티토 시절에는 인간미가 넘쳤고 스트레스는 덜했다.


 가난한 농민 출신에서 세계적인 지도자 반열에 오른 티토는

 한편으로는 쾌락을 탐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새 옷 사기를 좋아하고, 사생활도 복잡했으며, 혼외 자식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밉상이 아닌 모양이다.


 반듯하게 본받을 귀감은 아니지만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인물로 기억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티토 사후에 태어난

1980년 이후 세대도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티토의 고향인 크로아티아의 쿰로베츠부터

빨치산 투쟁의 근거지였던 보스니아의 비하치를 거쳐

유고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까지 순례하는 레드 투어가 유행한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으로

갈라진 경계를 넘어서 왕년의 티토처럼 화합하고 연대하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다.

1980년 티토의 장례식장 풍경이 동서냉전을 넘어섰다.
 영국에서는 대처가 참석했고,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방문했다.


 제1 세계와 제2 세계는 물론 제3 세계 지도자까지 그의 죽음 앞에 고개 숙여 애도했다.

거인이 물러나자 티토에 필적할 후계자가 없었다.
 초인이 사라지자, 소인들의 시대가 열렸다.


 먼저 치고 나간 것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였고,

세르비아에서도 티토가 죽고 나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각 공화국마다 티토 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불만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의로움을 감수하기보다 이로움을 앞세웠다.
 1980년대 자유화와 민주화 조치는 유고 내전이라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발칸 내전의 진상을 살펴보면 독가스 살포를 비롯해 근대적 기술을 활용한 살육이 아니었다.
 총도 아니고 칼과 도끼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요구하는 것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념 전향이 아니었다.
 단연 개종이었다.
 총검을 앞에 두고 강제 개종이 단행되었다.


 거부하는 이들은 정교 성당에 밀어 넣고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성직자들이 깔끔하게 면도하는 가톨릭과 달리 정교 신부들은 턱수염을 길게 기른다.
 혐오스러운 수염을 베어 버리고 눈을 뽑아버리고 코와 귀는 잘라버렸다.


1991년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이 해체되었다.
 발칸에 세워진 유고 연방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떨어져 나갔다.
 1992년의 유고 연방의 ‘신유고연방’이라고 한다.

신유고연방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이은 세 번째 유고였다.

 하지만, 세르비아 중심성이 훨씬 심화되었다.

 

<코스보>

 코스보는 2008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세르비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세르비아에서 자유롭게 코스보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


저자는 현지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세르비아 국경에서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로,

스코페로에서 북부의 국경 도시로,

그곳에서 다시 코스보로 들어가는 어려운 길을 택해 250㎞의 길을 나흘 만에 도착했다.


1999년 3월,

 78일에 걸쳐 나토의 유고 공습이 가해졌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1년 해체되었고 미국 일국 체제가 확립된 직 후였다.
 제3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초토화되었다.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

화학무기도 대량 투하되었다.

독성 물질이 완전히 제거되는데 10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민족 정화를 중지시키기 위한 인도적 개입이라고 했다.

그해 1월부터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이 합의하여 조인만 남겨 둔 상태였다.
 최종 국면에서 변수가 일어났다.


 나토군이 유고 전역에서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허가하고

군대 주둔과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된 내용을 밀로셰비치가 거부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나토의 공습이 개시된 것이다.
 무차별 폭격으로 세르비아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나토군이 무력으로 떼어낸 코스보는 유엔과 EU,

나토가 지배하는 땅이 되어,

네 개 권역으로 나누었다.
 증앙부에는 영국군이, 북동부에는 프랑스군이, 서부에는 독일군이, 동부에는 미군이 머물렀다.


 이로써 유고는 완벽하게 해체 단계에 이르러 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6개 공화국은

물론 자치주까지 쪼개져 나간 것이다.

유고 공습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세르비아는 방편일 뿐이다.
 밀로셰비치는 수단일 뿐이다.
 목적은 유고에 있었다.


 서구식 자본주의도 아니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실험을 추진했던 유고를 지워버리려고 했다.
 서구에도, 동구에도 기울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추구했던 유고를 지워 버리려고 했다.
 다른 근대화의 맹아를 뽑아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다른 백 년의 불씨를 밟아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폴란드 사상가 리샤르트 레구트코와의 대화>

리샤르트 레구트코는 1949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웬사가 폴란드의 정치적 지도자였다면

리샤르트 레구트코는 사상적 지도자였다.


2005년 폴란드 상원의원으로 대변인을 맡아 글을 쓰고 말을 했다.
 2007년에는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현직 유럽의회 의원이며

 저자는 그를 브뤼셀에서 만났다.


본인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폴란드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탐구한 끝에

40년 살았던 공산주의 사회와 30년 경험한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했다.


 공산당 간부들과 그 체제에 부역했던 이들이 민주화 이후

신흥 지배층으로 이행한 것은 동유럽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옛 공산당원들이 자유민주주의자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로 변신하여 기성의 지위를 유지한 것이다.

 체제는 변했으되, 지배층은 변하지 않았다.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도 유사하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한 뿌리를 공유한다.


 어떠한 타협과 절충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단과 이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산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전체주의적이다.
 열린 사회가 아니라 닫힌 사회 꽉 막힌 사회가 되어간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할지 말하고 글을 쓸 때는 어떤 단어를 사용할지

그 모든 것이 사전에 정답으로 주어져 있다.


 이에 어긋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계급의 적이니 부르주아 속성이니 하면서

딱지를 붙이고 혐오를 부추긴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 사회도 놀랍도록 비슷하다.
 대화와 관용, 다양성 등을 상투적으로 말하지만

자유민주주의만큼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사회는 없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만들고,

비슷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며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른 생각과 다른 언어, 다른 감수성에 대해서 절대적인 혐오감을 나타낸다.


공산주의 시절 가장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 리얼리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이었다.


 거짓 세계 속에서 연극하며 살아간다.

말과 실체가 일치 않고 프로파간다와 현실 간의 낙차와 괴리를 매일 같이 실감하며

환영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으로 몹시 불쾌한 거짓된 삶으로 느껴졌다.

1989년 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써 현실 속으로 진입한다는 기대감과 쾌감이 있었다.


 공산당 선전기구들의 가짜 뉴스에서 해방된 진실 시대로 이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곳이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실생활을 장악했고

높은 기대가 낙담으로 바뀌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진단에 확증을 갖게 된 것이 EU 활동을 통해서이다.

만약 유럽의회가 현시점 최고의 기구라면

자유민주주의는 바람직한 이념도 아니고 아름다운 제도도 아니다.


불행히도 그리고 매우 불쾌하게도 공산주의와 너무너무 닮아 있다.
 EU와의 첫 대면부터 숨 막히는 정치적 독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현실 세계의 오작동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공산주의 시대처럼.


 비록 지금 몇몇 시행착오가 있고,

 몇몇 나라에서 오작동이 발생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해피 엔딩으로 귀착될 것이다 하고 맹종한다는 점에서

브뤼셀 관료들과 모스크바의 옛 관리들은 놀라우리 만치 흡사하다.


 사석에서 만나면 회의감이나 불안감을 표출하지만

정작 회의장 안에 들어가면 모두 정색을 하고 EU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EU 도처에서 위기의 징후가 수시로 드러나는데도

곳곳에서 모순이 표출하고 있는데도

역사는 우리 편이라며 외면하는 모습도 옛 공산국가들과 너무나 닮았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완전히 갇혀서 살았고,

자유민주주의자들 또한 자유민주주의에 갇혀서 살아간다.
 가기 충족적인 세계 안에서 자기가 만들어 놓은 허상과 환상 속에서 자족적으로 사는 것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도 가장 이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다뉴브 강을 끼고 있는 중심가는 그 자체로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아름답기가 세계 두 번째라며 한껏 치켜올린 여행자도 있고,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살기 좋은 도시라 평가한 경제지도 있다.


1963년생인 빅토르 오르반은 1989년 체제의 주역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으로 살아남았다.

폴란드에서도, 체코에서도, 루마니아에서도 당시의 기수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로지 오르반만이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단하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헝가리인들이 깊이 호응하고 있다.


 내부의 적수가 부재하자, 외부에서 딴죽을 건다.

대표적인 인물이 헤지펀드의 대부 이자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자본가 조지 소로스다.


 1989년 오르반은 소로스재단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배운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1989년 청년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었다.


200년대 초반까지 오르반은 소로스 노선에 충실했다.

하지만 2010년부터 방향을 틀어 궤도를 급수정한 것이다.


중부 유럽 대학은 1991년 소로스가 모국에 세운 대학원 중심의 명문대학으로

엘리트를 배양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소로스 키드들을 배출하는 인제 양성소였다.


 오르반이 그 중부 유럽 대학을 폐쇄하려 들면서

조지 소로스를 헝가리의 적이라고 명시하기까지 했다.


소로스 여전히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고

다 문명 세계의 가능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헝가리를 미국 같은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그의 선의를 인정하더라도

그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 신념이 개탄스럽다.


오르반의 시선은 유럽을 넘고 있다.

헝가리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일대일로에 호응했다.

그리고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에도 앞장서 가입했다.


 유라시아를 종과 횡으로 엮어가는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석유와 천연가스 수송관,

인터넷 연결망이 죄다 헝가리를 통과하게 된다.

2017년 현재 빅토르 오르반은 독일의 메르켈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다.
 존재감 없는 영국 총리나 허수아비 프랑스 대통령과는 급이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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