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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Dec 29. 2021

아라비아의 로렌스(6)

9월 19일 새벽 4시 45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영국군이 보유한 500여문의 대포가 

팔레스타인 전선의 터키군을 향해 포격을 개시한 것이다. 


타파스 거리 곳곳에 시체가 늘려 있었고 대부분 소름 끼칠 만큼 참혹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소녀와 여인들은 죽음을 맞기 전에 능욕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톱 모양의 총검으로 괴기스럽게 난자당한 채 낮은 담벼락에 나체로 걸쳐진 임산부의 모습은 

로렌스에게 선명한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그 주변에는 20여 구 이상의 시신들이 나뒹굴었는데, 

살해 방식은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음란한 취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도 가혹한 우연의 일치였다. 

지난 2주 동안 로렌스와 동행하고 여기까지 말을 달려온 부족장 가운데에는 

타파스의 지도자 탈랄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 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본 탈랄은 두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퇴각하는 터키군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암말과 함께 쓰러졌다.
 곧 적군의 창 끝에 둘러 싸인 그의 몸뚱이는 기관총 세례로 벌집이 되었다.


역시 그날 오전에 타파스로 달려온 아우다 아부 타이와 상의한 로렌스는 

부하들에게 더 이상 적군을 포로로 살려 두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9월 27일, 

그 기나긴 하루가 저물 때까지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아랍군 공격 부대는 달아나는 터키군 2000명의 대열을 그야말로 순식간에 

세 등분으로 쪼갠 후 한 무리씩 몰살하기 시작했다.


 터키군과 독일군을 가리지 않았고, 

부상을 입거나 지쳐서 투항하는 병사들도 바로 죽여버렸다. 
 타파스 주민들도 지난 4년 동안 압제자로 군림한 터키군을 응징하기 위해 아랍군에 합세했다. 

물론 무수하게 널린 터키군 시체를 뒤져서 쓸 만한 물건을 챙기려 따라붙은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학살의 일반적인 양상과 견주어도 이번 사태는 유난히 잔혹하게 흘러갔다.

 


터키군이 병영을 임시 군인병원으로 전환한 뒤 

9월 29일 이곳을 방치한 채 달아났다. 

그것에 남겨진 환자 800여 명은 부상과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아랍군이 비적 떼처럼 덮쳐 환자들의 식량과 의약품을 모조리 약탈했고, 

심지어 쓸 만한 물건을 뒤지기 위해 환자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인근에 막사를 차린 호주군 파견대는 정문에 초병 두 명만 세웠을 뿐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들을 전혀 보살피지 않았다. 


 쥐새끼들이 피에 젖은 마룻바닥을 밑으로부터 뚫고 들어와 시신까지 파먹었고, 

두 세배나 부풀어 오른 시체들은 퉁퉁 부은 얼굴에 시커먼 입술로 웃고 있었다.  

심하게 부패한 몇몇 시신에서는 터진 거죽 사이로 부패한 내장이 줄줄 흘렀다. 


로렌스는아랍군에게 식량과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터키군 포로들을 동원하여 시체를 묻을 만한 거대한 구덩이를 파 묻게 했다. 


둑이 무너졌다. 

10월이 다 가도록 이집트 원정군과 아랍군은 북쪽으로 패주하는 터키군 잔당을 추격하면서 

소탕 작전을 이어갔다. 


훗날 케말 아타튀르크가 되는 터키군 사령관 무스타파 케말은 

10월 말이 되어서야 터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 가장자리에 

어렵사리 저지선을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전체를 빼앗긴 뒤였고, 

콘스탄티노플은 화평을 제안한 상태였다. 



 결국 10월 31일에 무드로스 정전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실각한 세 파샤(제말, 엔베르, 탈라트)는 

슬그머니 독일 어뢰정을 타고 흑해 너머로 도피했다.


불가리아는 9월 말에,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불과 6일 차이로 굴복했다. 

독일은 예상대로 가장 오래 버텼다. 

그들이 자랑하던 힌덴부르크 저지선에 대여섯 군데가 뚫리면서 병사들의 집단 투항 사태가 잇따랐다. 


 결국 11월 11일 이른 아침, 

독일 협상단은 프랑스 파리 인근 콩피에뉴 숲속 열차 객실 안에서 

연합군 대표단을 만나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쿠르트 프뤼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 놀라운 사건들을 스위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9월 말 그것으로 건너간 독일 첩보 책임자는 

이집트의 전 지도자의 말썽 많은 장남을 동맹국 편에 가담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조국이 패망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10월 말경 빈손으로 독일로 돌아왔다.


아론 아론손은 그해 가을에 발생한 사건들을 미국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동맹국의 패전이 임박하자

 10월 중순 무렵 뉴욕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서둘러 영국으로 돌아왔다. 


 터키와 독일이 항복하면 

전 세계의 이목은 파리에서 열릴 평화회담에 쏠릴 것이라 생각한 그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약속한 벨푸어 선언을 이행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로 결심했다. 


반면 윌리엄 예일은 전쟁의 클라이맥스를 몸으로 체험했다. 

그는 연전 연승하는 영국군과 함께 시리아를 그대로 관통해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독일이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가올 파리 평화회담에 미국 사절단으로 동행하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렸다.


역설적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중동 전역에서 각축전을 벌린 수많은 첩자와 정보요원 가운데 

전쟁의 대단원을 장식한 여러 사건에서 철저히 배제된 인물은 로렌스였다. 


 파이살과 앨런비의 회담이 끝나고 나간 뒤, 

로렌스는 아라비아를 영영 떠나서 영국으로 돌아가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앨런비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로렌스의 반항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아니면 그의 명예 관념을 존중했는지 결국 허가해주었다. 

 


이라크는 파이살이 군주가 되는 아랍왕국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아라비아의 경우 영국은 헤자즈를 다스리겠다는 후세인의 요구와 

아라비아 내륙을 통치하겠다는 이븐 사우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로렌스가 깜짝 놀란 것처럼 후세인의 네 아들 가운데 

가장 게으른 압둘라는 대단히 훌륭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하여 트란스요르단 지역은 짧은 시간에 팔레스타인에서 떨어져 나와 

압둘라가 다스리는 오늘날 요르단에 해당하는 별개의 왕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의 경우, 

전직 터키군 지휘관이자 갈리폴리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이 

연합국의 터키 분할 계획을 거부했다. 


 1921년 가을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왔다는 듯이 전쟁에 나선 

프랑스가 실리시아 지역을 점령하려 들자, 

케말은 프랑스군의 침략에 맞서서 병력을 총동원했다. 


 오늘날 터키 국경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1923년까지 

그는 민족주의자들을 이끌면서 자국의 시장부를 뜯어먹으려는 모든 세력을 상대로 

4년 넘게 전투를 벌였고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아타튀르크 칭호를 얻었다.

무수타파 케말

마크 사이크스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가 중동으로 추진한 재앙과도 같은 정책들과 동의어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결과를 살아서 확인하지 못했다. 


 2월 10일 밤 사이크스는 과로한 것 같다고 투덜대면서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지 못했다. 


 스페인 독감이라고 진단했고, 

그날부터 닷새 동안 호텔 방에 누워 같은 병에 걸린 아내 이디스의 간호를 받았지만 

40세 생일을 한 달 앞둔 2월 16일 밤, 눈을 감았다.


1919년 5월 15일 오전, 

아론손은 런던에서 파리회의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활주로에 안개가 끼여 이륙이 지연되고 있었다. 

비행을 포기하고 돌아 가려는데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여 소형 우편물 수송용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비행기가 날아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칼레 앞바다에서 쾅하는 굉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이 전부였다. 

아론손의 시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로렌스는 그 당시 전쟁신경증으로 불리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으로 고통받았다. 

끝없는 악몽과 몇 차례 자살을 생각했을 만큼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나머지 생애를 견뎌야 했다. 

혼자 떨어져 지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예전 친구들 과도 대부분 절교했다.


로렌스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보빙턴 기지로 가서 전보를 쳤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타는 두 아이를 피하려고 급히 방향을 틀었으나 

모터사이클이 자전거 뒤쪽 타이어를 스치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모터사이클은 완전히 부서졌고, 

로렌스는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는 보빙턴 기지내 병원에서 장시간 수술을 받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6일을 버티다가 

1935년 5월 19일 이른 아침 46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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