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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값’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의 값을 매기는 행위는 그것을 상품으로 보는 시선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음악은 상품인가? 당연히 그렇다. 현대로 오면서 음악을 그저 예술작품이나 순수한 미적 가치를 추구한 결과로 보는 관점은 더욱 서있기 힘들다. 물론 여전히 절대미학의 차원에서 음악의 의미를 논하거나, 얕은 수준에서 거래되는 물질로의 음악이 아닌, 인류사적으로 음악이 지니는 고고한 의의를 찾아가는 과정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자본과 온전히 분리된 예술음악마저 존재하기 힘든 이 시대에서 돈과 음악의 관계에는 많은 논의가 수반된다. 다시, 음악을 상품으로 보는 관점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우리가 돈으로 음악을 산다는 것에 대해 이미 어떠한 ‘거부감’도 느끼지 않는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
마땅히 이상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예술작품에 어떤 정확히 대응되는 값어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에 보통은 동의한다. 노래방에서 백점 맞은 노래가 백점어치가 아니고, 십만원을 내고 본 연주회가 꼭 십만원어치가 아니라고 말하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통 3분 30초 언저리의 대중가요를 한 달 동안 무제한 스트리밍하는데 오천원 남짓한 대가를 아무렇지 않게 지불한다. 물론 이는 음악의 ‘청취권’을 구매하는 것이지, 그 음악 자체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기에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 자체를 구매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은 채 이런 불만을 가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돈으로 음악을 사는 세상이 왔다고 전제한다면, 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음악을 다운로드 받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지불하는 법이 있을 것이고, 또 음악을 물리적인 품목으로 담아낸 앨범, 음반, LP판 등을 구매하는 법이 있을 것이다. 또 꼭 청각 자극만으로 제한된 작품을 뛰어넘은 시청각 서라운드의 뮤직비디오를 구입할 수도 있고, 실제 연주회장에 방문하기 위해 지불하는 티켓값에는 남은 오감의 자극과 몸소 느낄 수 있는 ‘경험’과 ‘체험’을 사는 것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런 모든 행위가 결국 가져오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나? 혹, 이런 지당한 상식에 당위성을 묻는 일이 정신 나간 짓인가?
음악은 범세계적, 보편적으로 모두의 ‘취향’ 안에 놓여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는 찾아내야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는 잘 없다. 비전공자, 아마추어, 문외한과 같은 수준, 아니면 성별, 인종, 세대, 국적, 교육수준과 같은 기준으로 인류를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늘 특정 비율 이상은 음악에 우호적이며, 그 어떤 예술보다도 만국공통어와 같은 의미를 표방하며 고급문화와 하위문화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음악이기에, 산업화 이후의 세계 속에서 그것이 겪어올 수밖에 없던 형태나 인식, 분류 단위의 변화는 여유를 조금씩 갖추게 된 중산층 중심의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돈이라는 요인과 접점을 크게 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보완-발전되었다. 이는 과거로부터 후원을 받아와야 했고, 그것이 당연했던 시기부터 개개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사용하는 현재에까지 이른다.
과연 비음악인에게 굳이 음악의 ‘소유권’을 가져야 할 명분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우리가 음악의 청취권을 산다는 것은 음악을 사는 것과 의미를 크게 달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음악을 ‘돈이 되게 파는’ 방법은 무얼까? 이는 음악이 가진 개별 요인과 특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출발한다.
더 많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음악을 빨리, 잘 팔아보려는 움직임이 극대화된 연예인 기획사나 프로덕션 단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작품, 아무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을 창작하려는 장인 정신도 존재한다. 이는 예술을 더욱 수치화할 수 없는 영역으로 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