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 교향곡 1번의 새 판본을 만든다면
음악의 판단을 결정하는 요인에는 많은 것이 있다. 그중에서도 서면 기록으로서의 ‘악보는 후대에게 마치 고정된 불변의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악보가 누구에게나 똑같은 텍스트는 아니다.
악보에도 연주자의 임의적 표현과 의도의 개입을 보장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같은 음악에 대한 여러 악보 유형, 그 판본이 만들어내는 간극은 악보와 악보 사이를 뛰어넘어, 악보와 음악 사이에도 관여하는 것이다. 이미 판본이 존재하는 작품에 새로운 판본을 출판한다는 것은 도전이다. 때로는 무모할 수도 있고, 시대에 꼭 필요한 요구의 반응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평가는 당신들의 몫이다. 나의 의문은 이미 5개의 개정 판본이 존재하는 이 작품이 도대체 왜 이토록 많은 개정의 시도가 있었는지에서 출발한다, 내가 브루크너 교향곡 1번의 새 판본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악보를 관행의 산물로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악보는 당연하게도 시대를 반영하며, 작곡가 자신의 ’초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창발하는 의의는 양날의 검처럼 작은 그림자를 몰고 온다. 작곡가의 초상을 감히 건드리는 것이 가능할까? 그가 본래 자신의 곡에 담아내고 싶은 요인들은 작곡가가 정한 순서와 규칙 아래서 그려진다. 그러나 때로는 그림이 바래져 선명하게 색을 덧입힐 필요가 있듯이, 악보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편집자도 그들의 초상을 덧그려야 하는 것이다. 내 판본은 브루크너의 테두리 선을 뚜렷이 하는 작업이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 무슨 색인지 알아보기 힘든 곳에, 잠시 브루크너의 손과 정신을 빌려 채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절대로 정해진 ‘선’을 넘어서면 안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편집자이다. 독자는 이것에 유의하여 내 판본을 가장 유용한 방향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악보를 미디어의 의미로 보기 위해서이다. 악보는 여러 성부의 관점을 집합적 ’내러티브‘로 표현한 지면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종이 악보가 아닌 PDF 파일로서의 악보로만 음악 작품의 기록을 공유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내가 악보를 전자적으로 보든, 서면으로 보든 우리는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판본은 음악을 해설하고, 많은 지휘자가 시도한 템포를 각주로 두며, 정확한 지식에 덧붙인 독자-친화적인 부록과 함께한다. 마디 번호, 성부 각각과 연동된 QR코드를 찍으면 음악을 청각 정보로 체험할 수 있다. ’음악을 보고, 악보를 듣는다‘는 것. 내 판본은 이를 추구한다.
’대기만성형‘ 작곡가 브루크너의 악보는 그 자체로 성숙하다. 작곡가 자신이 성숙한 정신으로 창작한 작품은 그 기록에도 성숙함이 깃드는 법이다. 연차 쌓인 지혜를 담은 음악에는 브루크너의 손때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모차르트처럼 머리로 곡을 쓰고, 이것을 이후에 옮겨적는 식의 ’영재‘ 음악가가 아니라는 점이 그의 악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내 판본이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1891년 개정판이며, 카라얀의 선택을 받은 판본인 만큼 나 역시 이 판본이 깊숙이 분석되고, 참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작업에 있어 가장 유의했던 점은 판본의 본질적 특성에 있다. 기존 판본들의 장점, 필요성을 수용하면서, 내 판본만의 강점을 통합-보완하는 것이 중요했다.
판본은 음악 표면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 이면을 꿰뚫어 봐야 한다. 작곡가의 의도를 왜곡해서는 안되지만, 작자 본인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의식을 일깨우는 악보를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하는 식의 논의를 던지고 싶다면, 작곡가의 의도가 온전히 악보의 ’의도‘로 전달되지는 않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악보에는 작곡가뿐 아니라, 출판사, 편집자, 인쇄소, 연주자, 분석자, 심지어는 감상자가 개입한다. 이 판본이 한 사람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넓은 이해와 공감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음악의 전부가 역사적인 기록이 아닌, 지금 들리는 것, 그리고 ’읽히는 것‘임을 강조하며 서문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