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운명과 죄악의 굴레를 엿보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신에 의해 정해져 있었고, 신이 내린 신탁대로 실현되었다. 이때 오이푸스는 '죄인'인가? 그에게 살인과 근친상간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죄인’이라 명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에 ‘의도성’이 분명한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의도치 않게 죄를 짓는 경우들도 존재하지만, 죄인이라는 명제의 성립은 그 고의성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그가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친어머니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당연하게도 신탁을 이루려는 목적이 아닌,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목적으로 테베를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왕족이 자신의 친아비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해봤을 때, 오이디푸스는 죄인일까? 아니, 오히려 억울한 자에 가깝다. 그는 신들의 장난에 조롱당하고, 시대의 비극에 희생당한 인물로 보일 확률이 더 높다. 그럼에도 내 결론은 놀랍게도 오이디푸스는 결국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그 끔찍했던 신탁을 피하려 노력했다. 되려 이를 피하려다 신탁에 그 누구보다도 가깝게 도달한 인간이 된 것이다. 만약, 그가 그에게 정해진 환경에 순응했다면, 말 그대로 “가만히” 적응해 새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살았다면, 그는 오히려 신탁을 이루지 못했을지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다 가정일 뿐이며, 어떻게 해서든 돌고 돌아 신탁에 다가갔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다른 누가 시켜서, 혹은 그를 마치 꼭두각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서 전개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아버지를 죽였고, 어머니와 동침했다.
만약, 아무리 신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나약한 인간은 결국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들, 인간이 실천한 행동, 저지른 죄, 내뱉은 말들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당연히 아니다. 오이디푸스에게는 살인과 근친상간의 책임이 분명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기준으로 그의 죄, 형량을 따져 묻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사실, 그 본질은 영웅담이다. 그토록 빛나고 대범한 영웅에게는 그만큼의 무거운 짐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법이다. 이 영웅의 ‘살인’은 마치 악덕한 인간을 물리친 것처럼 묘사되고, 그의 ‘근친상간’은 한 여자를 트로피처럼 얻어낸 과거의 영광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이를 바라봐도 분명 역겹고 이상한 행위들로 전락한다.
고대 그리스 윤리관에 따르면, ‘죄’는 윤리적으로 전염되는 특성을 가진다. 그의 만행으로 점점 그의 가문은 더럽혀지고, 테베라는 한 국가 역시 몰락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렇게 대단했던 영웅은 최상의 위치에서 최하의 위치로 내려온다. 그는 육체의 눈을 스스로 찔러 잃은 대신, 신의 뜻과 진리의 깨달음을 얻게 되며 극은 마무리된다. 이 또한, 양날의 검처럼 그를 단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주인공이 아닌, 수많은 역경과 고통을 견뎌 결국 그토록 갈망했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의 대답과 자신의 정체성, 그 “앎”에 따다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하지는 않을까? 달이 밝을수록 세상은 어두운 법. 그는 한 명의 죄인이자, 또 한 명의 인간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극중 테이레시아스는 평범한 총각이었지만, 뱀에 의해 여자가 되었다가 다시 남자로 살게 된 인물이다. 그는 또한, 오이디푸스의 미래를 복선처럼 예기하기라도 하는 듯, 신들에 의해 장님이 되어 표면의 눈을 감고, 또 신들에 의해 세상의 진리에 눈을 뜬 인간이 된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으로, 당연히 그의 등장과 아우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묘사가 유독 흥미로웠는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그러나 어딘가 신비로운 능력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리스의 최고 예언자답게, 오이디푸스의 질문에 대해서도 그 핵심만 꿰뚫어내는 대답을 건네주며 말세인 테베에 퍼져가는 죄의 뿌리를 깊이 한탄하는 것으로 보아, 지혜를 갖추어 신의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는 않은 인물로 느껴진다.
한편, 크레온은 아주 합리적이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는 왜 이러한 인물형을 극 중에 삽입해야만 했을까? 단순히 인간 가치관의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스의 “polis”에서는 지혜의 단계가 존재한다. 가장 낮은 단계의 지혜를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것”, 가장 높은 단계의 지혜를 “신의 뜻을 앎에 다다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전자는 크레온으로, 후자는 테이레시아스로 대표된다. 상징적 인물들의 등장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아마도 크레온이 가진 지혜는, 역시 지혜라고 부를 수 있긴 하다만 장려하지 않고, 되려 장님인 테이레시아스의 지혜가 더 고차원적인 지혜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크레온은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감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크레온은 근원 ‘악’도 아니지만, ‘선’과도 거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이익을 잘 계산하고, 셈을 잘하는 것이 아닌, 백성들의 안위와 권력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즉, 욕망이 아닌, 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비권위적인 인간이야말로 통치자의 자질을 갖춘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하나 짚어보고 싶은 지점은 코로스의 역할이다. 이들은 단지 극을 풍성하게 하고, 이야기를 간략하게 ‘나레이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코로스의 말 하나하나에는 깊은 은유와 궁극적인 극의 메시지가 은연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75쪽 코러스에서는 “오만이 폭군을 낳는다”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영웅인 오이디푸스가 한편으로는 죄인인 것처럼, 그는 한 나라의 권위높은 왕이자, 폭군이다. 그리스 비극을 이루는 인물들은 각각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는 특징이 있는데, 이 모든 성격상은 모두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것이지, ‘후천’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보통 인간의 성격은 선험과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것에 반면, 이 곳에서 설정된 캐릭터의 성향은 조금은 동떨어진 시선으로 바라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비극을 만들어낼 일종의 성격적 결함과 비범한 행동을 취할 능력 역시 갖췄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현실과 달라 흥미로우면서도, 현실을 살아갈 교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코로스의 대사에 드장하는 오만은 ‘어떤’ 오만을 이야기한 것일까?
모든 것을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해야한다. 테이레시아스의 경우, 그는 눈을 잃었다.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오만의 만행은 이곳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그 근원을 파악하려 했고, 분수를 알지 못한 채 신의 뜻을 다 알려했으며, 그것을 알고서는 신탁을 모조리 피하여 자신의 운명에 배반하는 삶을 살려했다. 그에게는 주어진 위치가 있었고, 신의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몫’처럼 작용하여, 오이디푸스를 옭아맸다. 그는 알아야만 했지만, 더 알아서는 안되었다. 그 이상의 것을 알려한다면, 피할 수 없는 죄악이 되어 그에게 돌아올 것임 역시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올 것은 온다.” 이 말은 잘못 해석하면 매우 수동적이고 무책임한 제안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올 것은 오기에, 우리는 살면서 어떠한 불행이 오더라도 그것으로부터 회피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는 방안을 제시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운명이란 몫을 의미하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이어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단지 자신뿐이 아니다. 신의 심판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알지 못하고 살다 죽겠다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오이디푸스는 죽어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야 하겠다는 고집으로 그의 가문과 국가에 파멸을 가져왔다. 그리스 비극에서 나타나는 집단의 오염은 지금의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단지 “근묵자흑”의 차원이 아니라, 통치자의 문제는 그 나라의 문제를 상징했고, 확장된 의미를 보여준다. 코로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은 살면서 고통받다 죽으러 가는 것이구나”. 그 고통 역시 자신의 몫이라 여기며 버텨내야 하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으러 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며,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