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는 연주하는 시공간이다?

연주를 넘어선 ‘연주회’의 의미

by young

연주회는 단지 연주 ‘공연’으로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여러 사회-문화적, 정치적, 인류사적 함의는 연주회라는 시공간 안에서 새로운 가치들을 창발하고, 음악을 듣는 ‘설정된’ 상황을 제공한다.


연주회를 통해 연주자는 음악과 청중 사이의 매개자로 본인을 포지셔닝하고, 지휘자는 연주자들의 모든 선택에 책임지는 리더로서 인식된다. 악기와 악보는 도구, 음악은 본질, 청중은 목적이라면, 연주회는 이 모든 과정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는 ‘매체’이다. 음악이라는 줄거리를 연주회라는 소설 속에 담아내고 있다면, 소설은 줄거리 없이 존립할 수 없다. 그러나 줄거리는 소설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청중과 마주하기 쉽지 않기에, 결국 소설이라는 틀을 갖추어서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규칙 안에서 더욱 자유롭고, 음악도 연주회 속에서 자유롭게 청중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다.





내가 기억에 남은 연주회 음악은 현대음악 작곡가 김신의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성운”’이다. 이 곡의 초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크누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제 78회 정기연주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단체이며, 1993년 설립한 음악원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다양한 순회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연주회는 하나의 큰 대표적인 테마를 가지고 진행되는 경향이 있는데, 위 같은 경우에는 ‘대편성’이었다. 말러 교향곡 2번과 김신의 ‘성운’은 모두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웅장한 사운드와 음향적 효과에 집중하여 청중을 압도할 준비를 해왔다. 이 연주회가 개최된 곳은 롯데콘서트홀이었는데, 확실히 콘서트를 위해 계획되어 지어진 프로페셔널한 홀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전달되는 소리의 설득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크누아심포니오케스트라는 이미 전문 연주자로 거듭난 이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예술가 양성 학교의 학생들로만 이루어진 이 단체는 그 이유로 인해, 쉽게 학교를 ‘과시’하는 차원의 수단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칼각 맞춰 입은 정장, 발걸음 소리까지 맞춰 군기 잡힌 그들의 움직임은 연주를 잘하기도 전에, 잘할 것 같은 ‘인상’을 짙게 풍기며 청중의 기대를 높인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음악 제일 잘한다는 학교들의 반열 중 한 곳의 학생들인데, “어딘가 다르겠지”라는 판단은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책임을 얹어내며, 관객석을 채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들, 즉 그 학생들의 입장에서 이 연주회를 바라본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발생되기도 한다.



그들은 일종의 전공 필수 과목으로 이 오케스트라 수업을 수료해야 하며, 출석, 태도 점수는 그들의 졸업 성적에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다. 두려운 선배 문화, 교수님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 역시 그들이 음악을 대할 때 외부적 요인이 되어 더 열심히, 어쩌면 더 잘 연주회 참여에 임하게 했을지 모른다. 연주회의 좋은 품질과 음악 내외적으로 수준 높은 결과는 정치용이라는 위대한 거장 지휘자의 손과 이들의 재능, 그리고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사실 김신이라는 작곡가 역시 한예종의 졸업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얼마나 그들의 ‘우월한’ 정체성을 스스로 확고히 하기 위해 이번 정기연주회를 계획했는지 느낄 수 있다.



연주회를 연구함에 있어 또 한 가지 구체적으로 관찰해야할 지점은 사실 연주보다도, 청중에 있다. 이번 연주회의 주된 청중은 누구였을까? 크누아심포니오케스트라와 전혀 관계없는 청중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대부분의 청중은 이들의 학부모나 지인, 초대받은 관계자, 한예종 재학, 혹은 출신의 음악가들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소위 ‘자기들끼리’의 문화를 즐기기 위한 행사로서의 연주회는 객관적인 연주회 음악을 연구하기에 그닥 좋은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이방인, 또 ‘외지인’인 내가 보기에도 좋은 연주이자, 좋은 음악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이를 연구자의 태도로 밝히는 것은 꼭 필요한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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