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을 갈망하는 인간

young

by young

인공지능 시대가 우리 곁으로 다가온 지는 이미 한참 되었다. 그렇게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당연히 대두되었고,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공지능이 한 ‘시대’를 이룰 수 없음 역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직업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의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것, 이는 인공지능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의미만이 인공지능 시대의 전부일까? 인공지능은 인간이 서 있을 터전을 뺴앗기도 하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일자리와 명분을 만들어 인간에게 제공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취업난을 일으킴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복잡한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공생’, 또 ‘대결’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담론을 불러온다.


단지 기술의 발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는 인공지능은 많은 음악학자에게 음악 연구의 범위와 지평을 넓혀주었다. 음악을 그저 모방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데이터를 기반으로 머신러닝을 거쳐 새롭게 창작-연주 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은 이제 그들만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인간의 음악만을 다뤄왔던 기존의 음악사, 음악 실제 연구는 응당 새 시대의 기술과 인공지능 생성예술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초점을 넓히고, 그 대상을 변화해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음악이라는 것이 오로지 정신적인 산물일까? 음악을 작곡, 연주, 감상하는 데는 당연히 인간의 생각이 관여한다. 특히 전문적인 음악 활동, 비평적인 감상에 역시 고도의 사고과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음악을 실제로 ‘소리 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아닌 신체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깨, 손가락과 같은 ‘신체’에 있다. 지금 소위 ‘인체의 신비’와 같은 개념을 운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음악을 다루는 이슈는 늘 어쩌면 정신적인 측면에 국한해 진행되어온 경향이 없지 않다. 나는 인공지능이 가져온 이 ‘Ars Nova’에서 인간 신체만이 가진 아름다움과 그것들이 주는 감동의 힘을 음악 실제의 차원에서 인지과학적으로 연구해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창작과 연주력을 갖춘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의 정신을 고도로 흉내내는 것이지, 물리적으로 이들을 온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의 신체적 한계와 작업 속도 역시 보완해주는 것도 맞지만,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휴머노이드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기술 좋아졌네”라고 말하는 ‘신기함’이지, “얼마나 노력했길래 인체의 경지에 도전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경이로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들의 조작된 완전함은 우리 인간의 태생적인 불완전함 그 자체의 가치를 절대 대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에도 음악 공연의 현장감이 많은 이에게 소비되는 것이 아닐까?



흔히 우리는 대가들의 ‘피, 땀, 눈물’에 열광한다. 말 그대로, 피, 땀, 눈물을 흘릴 만큼의 노력과 그 흔적을 보고 울컥한다. 그만큼 인간은 시각적 결과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보이는 것에 민감하다. 미적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기인하는 경향이 크지만, 그것을 다 뛰어넘을 만큼의 감동과 울림은 온 팔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연주하는 손열음이나 발톱이 모두 다 빠져 기형으로 변한 발의 강수진과 같은 이들을 인정받는 ‘대가’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노력들은 이들의 존재를 더욱 정당화하며, 그저 데이터로 순식간에 ‘쇼팽’ 스타일의 피아노곡을 뚝딱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의 미학적 타당성을 의심케 한다.


인공지능의 ‘완벽함’이 왜 인간의 ‘완벽함을 향한 갈망’을 이길 수 없는가에 대한 답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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