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예프와 ‘들리는 것’의 논의

young

by young

음악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 음악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치 이러한 당연한 과정을 엄청난 결과처럼 어렵게 함축하고 긴 미사여구로 묘사하는 것이 그에 대한 분석이 된다고 오해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분석은 이를 넘어서서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와 질문을 남겨야 한다.



오늘 이곳에서 다룰 분석도 청중에게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이 과연 어떻게 “들리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포괄적인 작품 개관을 배제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라는 점에서 딜레마에 부딪힌다.



이 곡을 작곡한 프로코피예프의 삶은 다사다난했다. 소련에서 태어나 다른 작곡가들이 시대 정치에 굴복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고, 결국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런 그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은 그가 가진 피아노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19세기의 전통과 20세기의 혼돈을 양식적으로 엮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연 전통과 혼동을 양식적으로 엮어낸다는 말이 청중이 이 음악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문장인가.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고쳐지지 못한 분석학의 문제이다. 어떻게 도미넌트 화음이 역동적이고, 토카타 리듬이 긴장감을 유발하는지를 매번 심리학적인 근거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쉽게 뉘앙스의 문제를 단정하는 어투로 이야기하는 것은 큰 위험성을 내포한다.


내가 보고 들은 이 곡의 음색은 관습적인 ‘피아노스러움’을 전복했다. 첫 ff는 금관을, 경과구의 pp는 목관을, 2 주제의 p와 mp는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종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음색을 분석하는 것의 문제점은 무얼까? 꼭 작곡가가 의도한 것만 중요하게 들리지 않는다. 또 내가 목관의 소리로 수용한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현악적이라고 인식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석 또한 ‘논증’이고, ‘설득’이라면 나는 내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음색만큼 애매한 음악의 요소도 찾기 어렵다. 이것을 분석하는 것도 그만큼 애매할 수밖에 없지만, 음의 움직임과 악상의 배치, 음역, 배음렬을 포함한 원근감의 표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런 음색을 만들었다. 비슷한 프레이징은 조금씩 변형되어 다른 악상으로 제시되고, 정박적인 음운동과 각 성부의 질감은 이것을 뒷받침한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편안한 배치는 피아노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이 작곡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재질문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할 수 있는 “괜찮은” 분석이 있을까? 작품이 작곡가의 성격이나 감정을 실제로 담아낼 수 있을까? 현재의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음악과 소련 세계에 관한 몇 가지의 사료가 전부이다. 분석은 우리가 왜 그러한 ‘느낌’을 받는지에 대한 근거를 설명한다. 우리는 때때로 객관적인 해석과 주관적인 분석을 하는 오류를 범한다. 분석은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서술하는 과정이라면, 해석은 감상을 곁들여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으로 분명히 영역화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종류의 후기 낭만 음악은 더더욱 그렇다. 의도와 들리는 것의 간극은 최근의 음악사로 올수록 그 격차를 넓히고 있다.



작곡가의 삶, 작품의 배경, 음조직의 연결 등 다양한 측면의 분석이 존재하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같다. 작곡가가 더 좋은 곡을 쓰도록 격려하고, 연주가가 작곡가의 의도대로 연주하고, 이론가가 끊임없이 연구 주제를 양산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청중의 감상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것”에 있다. 언어가 “말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이, 음악은 “들어지지” 않을 때 그 의미를 상실한다. 아무리 음악의 미학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탐구한다고 한들, 음악은 소리 그 자체에 지나지 않다. 음 하나하나에 학문적 상징을 부여하는 것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그것에 집중되는 경향의 음악학은 금세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수단과 목적은 전복되기 쉽다. 그렇기에 지금, 음악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보다는 “어떻게 들려지고 있는가”에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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