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음악, 컨텍스트와 사운드

young

by young

대중음악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규정에 절대적인 필요성이 따를까?


어떤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개념을 수반한다. 말 그대로의 의미만 보면, 대중들이 듣는 음악은 모두 대중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이 듣지 않는 음악도 있나? 연주나 녹음되지 않은 ‘리허설’ 차원의 음악이면 모를까, 모든 음악은 기본적으로 대중이라는 목적을 향해 서있다. 들어지지 않으면 그 의미는 반감, 아니 거의 소멸되기 때문이다.

보편 탁월한 정의가 불가능한 대중음악은 그렇기에 음악학보다는 문화인류학의 영역에서 먼저 다뤄질 수밖에 없게 된다. 대중문화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요인과 맥락들에 근거한 하나의 ‘현상’이라면, 음악은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인 동시에 매우 큰 비율의 중요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대중음악도 공통관습시대의 서양음악과 동일한 방식과 잣대로 연구할 수 있을까? 대중가요가 가지는 의미를 도출하는 과정도 악보 속의 많은 특징, 조성과 리듬을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올까? 물론, 이러한 시도들은 분명한 가치를 보인다. 같은 음악인 만큼, 누군가는 동등한 형식적 관찰, 수평선 상의 접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용성을 따져보면, 사실 방법론적으로 대중음악은 다른 태도를 취하고 다가가야 하는 지점도 존재한다. 대중음악이 정착된 배경을 연구하는 데는 음악이 사회와 인간 사상을 반영, 형성하는 각각의 방식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이후에 음악 내적인 특징을 덧붙일 수는 있지만, 기업의 논리와 자본주의 산업 시대의 환경 요인을 넘어설 수 없다.



돈의 문제는 다른 어떤 음악에서보다 대중음악에서 가장 명확하게 두드러지는데, 후원 제도하에서 창작의 구조가 정해졌던 과거의 모습이 현대의 엔터테인먼트사, 소속사라는 옷을 입고 이어져 오고 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이윤을 얻기 위한 음악을 하는데,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쉽게 ‘공개채용’적인 개념으로 대중을 스스로 참여시킨다. 21세기를 참여예술의 시대라고 말한다면, 대중으로 하여금 마치 내가 모든 프로듀싱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듯한 소속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익을 창출한다.


이제는 작곡자보다 연주자가 주목받는 시대이다. 누가 음악을 작곡했냐고 말하는 것은, 누가 음악을 노래했냐고 말하는 것보다 거의, 늘 이후의 문제이다. 과거에만 해도 연주자보다는 작곡가의 위상과 역사화가 훨씬 더 대중에게 익숙한 일이었던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이는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것보다도, 보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음악 자체보다는, 그 음악이 연주되는 상황, 방식, 퍼포먼스, 이를 맡은 인물의 스타성과 같은 차원의 이슈는 언제나 큰 관심을 불러모으기 때문이다. 대중음악 연구에서 중요한 측면은 사실 음악보다도 그것이 행해지는 공간과 장면에 있는지 모른다. 재즈 카페, 버스킹, 클럽, 콘서트장, 심지어는 MD샵, 레코드 서점 등에서 흘러나오는 대중음악, 그리고 직접 그 음악을 음반의 형태로 사고파는 장들의 모임은 연구 거리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대놓고 도굴해볼 대중음악 소비의 행태는 민족지학적인 연구, 더 나아가서 사람들의 수요와 소위 ‘트렌드’가 팝, 락, ost 등등의 장르로 나타나는 체계를 엿보게 한다.



결론적으로, 밴드 음악이나 K-POP이나 생산-수용의 관계가 현시대의 관점 아래서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국면이 있다. 모든 시대 음악을 그 당시의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면, 지금의 대중음악도 언젠가는 역사 속에 ‘죽어있는’ 음악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렇게 문화사, 음악사 저서의 한 단락, 심지어는 한 줄이 될 대중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간극적 모순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이며,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를 들여다보고, 감상자가 얻을 수 있는 시대적 이해와 즐거움은 그 무엇보다도 진지하게 다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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