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타자가 될 수 없다

서동욱 <타자철학>을 읽고

by young

나는 결코 타자가 될 수 없다.


자아와 타아는 상대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개념이다. 이미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그 주변을 타자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타인들과는 구별되는 내 자아를 비로소 정립할 수 있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우리와 다른 이들을 분별하고, 긍정적으로는 ‘차별화’ 전략, 부정적으로는 ‘배척’을 실천한다. 왜일까? 타자는 말 그대로 타자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면 타자가 아니고,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온전히 이해될 수는 없더라도 수용되기까지의 충분한 시간과 서로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부분적으로 답습하는 상호 영향의 영역은 자아와 타아의 만남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타자, 또는 타인은 이타성에 대한 사유로부터 출발하는데, 이는 일상적인 영역에서부터 철학적인 영역 모두에 작용한다. 타자는 세계의 부분들에서 특정한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타자성 안에서만 출현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현대 철학의 주요한 경향을 불러온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에 의해 구체화된다.

타자에 대한 성찰은 사람들이 더불어 산 순간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내 마음과 내 몸과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는 흥미로운 미지의 분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종교적으로 타자성은 그리스인과 유대교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그렇다고 이러한 성찰의 지점이 오롯이 그들만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을 정의하는 방식도 고대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정으로 반성될 수 있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자성의 습득과도 맞닿아있는데, 전체주의적 사유의 자장 안에 나보다 우월한 어떤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나 이방인에게 느끼는 소외감 등의 감정 형태가 구체화되어 드러나고 있었다. 서구의 사고 바탕에 만연했던 ‘근대’라는 성과물은 하이데거와 같은 학자들의 의견 개진의 밑바탕이 되며 학문, 종교, 산업, 예술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발전-변화된 양상에 대한 사고를 가져온다.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차원에서도 타자성을 돌아볼 수 있는데, 능동성과 수동성과는 또 조금 다르다. 내가 직접, 내 생각으로 내 몸을 움직여서 어떤 의도적 행위를 하는 것과 그러는 행위를 하는 어떤 이를 지켜보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물론 추측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지만 내가 아닌 이는 영원히 제대로, 진정성 있게 바라보기 힘든 것으로 남는다. 또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과 시켜서 하는 것이 다른 것만큼 그 간극은 좁혀지기 어렵다.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르는 것을 그냥 놔두고는 못 견디는 것”. 근대 학문의 핵심적 정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사상은 역시 근대적 주체를 포지셔닝하는 방식을 제안함으로써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근대성 하에서 백인은 자신을 흑인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기고, 서구는 비서구에 비해 자신을 고귀하게 생각한다. 여전히 이러한 오류적 모순, 모순적 오류는 팽배하고 타자성이 가지는 한계와 부작용이 있다면 이러한 지점을 가르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럴수록 우리는 제대로 된 나와 타인의 관계를 보고,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는 절대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이 아닌, 우리 삶을 하나의 공동체라고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타자가 절대로 내가 될 수는 없다. 나도 절대로 타자에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고, 내재적이자 외재적으로 질서를 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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