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기 위한 생각의 여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독일관념론은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을 주체 개념으로 가져오는 것에 뿌리를 둔다.
데카르트는 인식하는 주체를 존재하는 주체로 확장한다. 그렇기에 새로운 주체 개념은 근대 철학의 전환점으로 작용해왔다. 이 텍스트는 “하나의 윤리학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하는데, 결국 모든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은 도덕이라는 곳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저자는 칸트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아쉬워하고 있다.
‘나’에 대한 문제는 자유로운 존재자라는 개념에서 다양한 학자를 거쳐 논의된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철학은 실재에 대해 고민한 결과이지만,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나를 바라보는 방식을 언어화하는 과정은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다. 그렇기에 물리학, 자연학을 공부하는 자들과의 소통 역시 늘 수반되어야 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철학이 이념들을 제공해주고, 경험이 자료들을 제공해 줄 때”,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들은 나를 둘러싼 세계 그 자체에서 오는 것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철학적 ‘사고’도 경험임을 인정하는 과정은 자연도 우리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자연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가 문제다. 모든 것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방식에 방점을 찍는다.
헤겔은 ‘인공물’ 개념을 언급하면서, 어떤 국가에도 이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국가는 특정한 목적으로 설계된 집단의 최종점으로, 이념과는 관계가 없다. 되려, 자유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이념이며, 자유에 대해 제대로 바라보고, 인간-소외적인 현상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인간 공장, 톱니바퀴 이슈로 논의되는 이러한 것은 애초에 헤겔의 입으로부터 고차적이고 진정성 있는 이념의 필요성으로 요구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을 국가의 족속물로 보는 것이 아닌,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하나의 주체로 보는 시도는 중요했다.
국가가 존립할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는 인간 존립에서 기인하고, 국가를 구성하는 사회 체계, 헌법은 모두 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불과하다. 이것을 인류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 정치적인 관점에서 그나마 조금은 떨어져서 나와, 나를 둘러싼 공간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모든 이념을 포괄하는 이성의 최고 활동은 심미적 활동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이전 예술철학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진리’와 ‘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철학자는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과도 같다. 아는 척, 겉치레로만 똘똘 뭉친 철학자(를 표방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 늘 질문을 하는 자로서 철학자는 정신이 풍요로운 자유 존재인 것이다.
시 예술의 고귀한 가치는 철학을 존재하게 만든다.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시로부터 온다. 직접적인 정보 전달과는 차원이 다른 시의 구성력과 표면이 아닌, 이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시의 함의성은 다른 모든 학문, 예술보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곁에서 우리를 발전시키고, 언제 어디에서나 지속되어왔다. 종교는 어떨까? 철학, 종교, 예술은 마치 삼위일체처럼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예술 없는 종교도 없고, 철학 없는 예술도 없다. 나 역시 예술을 전공하고, 공부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철학과 종교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친근하면서도, 자꾸만 예술의 입장에서 이들을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헤겔은 고차적 의미에서 취해진 플라톤적인 아름다움의 이념을 다루면서 풍부한 정신 활동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철학도 마치 예술처럼 시적이며 감성적인 인류의 교류로 생각했다. 철학자에게 필요한 종교는 대중에게 필요한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종교의 역사적 함의와 인간이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경전’의 개념을 제대로 읽어낼 줄 알아야 함이 더 요구되지 않을까 싶다. 시의 고귀한 가치, 그리고 대중과 공유하는 영역, 상상력. 이 모든 것은 철학자를 구성하는 요인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된다.
어떤 이념을 심미적이고, 신화적으로 만들기 전에는 그것이 민중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거나, 관심을 유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는 신화적 서사, 즉 ‘내러티브’에 쉽게 혹하는 인간 본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신화라는 것은 방식이다. 신의 존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교훈적으로 다루며 인간 계몽을 이끌지만, 이 모든 과정은 철학적으로, 또 이것을 받아들이는 민중은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답이다.
우리는 집단 간의 분노와 경멸로 똘똘 뭉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다양성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불신, 적개심, 통일되지 못하는 가치관과 관념이 팽배해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할 정도로 지식인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남을 대하는 태도는 미개하고, 야만적이기 다름없다.
모든 개인의 사유재산을 같게 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비현실적 차원의 대안이 아니라, 종교, 철학, 예술을 적절히 정치-사회-문화에 곁들여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억압되지 않은 ‘용기 있는 자’, 즉 정신적인 존재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는 여전히 존재한다. 철학자의 권력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비평가에게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었다. 어떤 예술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하나의 개인적 의견이 아닌, 매체에 의해 전파되는 공적인 의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것이 비평을 하는 진정한 목적과 의미에 합당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비평가의 의견이 그 작품에 대한 ‘절대적’인 관점이 되어버리면 어떨까. 모든 사람이 그 작품을 보고, 비평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단순히 획일화된 감상의 세계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지루’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내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화되어, 그것이 마치 나 스스로 생각한 것이라 믿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최근의 미디어가 가져다주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내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알고리즘으로 제공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다른 이들의 취향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같은 선호와 가치관을 강화, 재생산하는 것밖에 더 안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떨까? 생각하는 힘, 생각하는 학문 그 자체인 철학은 누구나의 것이기도 하며, 누구나의 것이 아니기도 한다. 내가 예전에 ‘철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마치 과거의 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시대순으로 외우는 것에 그친다는 오해를 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좋은 영감과 고전, 참고가 되는 것이지, 우리 자체의 이야기를 대변하지 않는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민중과 철학자는 동등하면서, 철학자의 이야기는 민중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에서 동등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철학자의 생각이 과도하게 주입되는 식으로 민중에게 다가가는 것은 가장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에 종사하는 성직자도 마찬가지이다. 민중은 그들과 공생하는 것이지,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부여된 각각의 자유, 그리고 개별 능력은 각자에게 주어진 ‘나’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으로 사용되며,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