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익숙해지기

'존재'와 '무'에 대한 고찰

by young


철학자들은 ‘질문’한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도 눈을 마주하고, 귀를 기울인다.


그것이 철학자가 갖는 존재 이유일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가” 정도는 생각해 본 적이 꽤 많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나, 존재를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어떻게 존재하는 상태가 되는가”, 그렇다면 “‘유’는 무엇이고 ‘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을 심층적으로 던져본 적은 잘 없는 것 같다.


‘무’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지점을 찾아가려면 고대 그리스까지는 가봐야한다. 명확히 알 수는 없어도, 와닿는 ‘무’를 말하고자 하면 이미 어떤 대상을 머릿속에 그리려고 시도한 것인데, 이는 절대로 무를 우리 사유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의 모순이자 반증이 아니냐는 논지다. 그렇게 되면 존재하는 특정 대상을 사유하는 것 역시 무를 사유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분명 발생한다.


플라톤, 헤겔, 하이데거, 사르트르, 레비나스, 파르메니데스는 이에 대해 각각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데, 플라톤은 “우리가 있지 않은 것을 말할 때, 있는 것과 대립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만을 말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 참된 것에 대한 진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니지만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사상은 “원본없는 복사물”의 중요성에 관심을 두는 현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된다. 헤겔은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미는 동일”하다고 이야기하며, 존재라는 것 자체는 존재하자마자 ‘무’로 양립이 가능하게 되는 것임을 밝힌다. 헤겔을 통해, “존재에서 무로의 소실, 무에서 존재로의 생성”이라는 원리가 발생한다.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었다가 바로 깨어나지는 않더라도, 윤회의 사상이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나름의 논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어떨까? 그는 존재 그 자체에 ‘무’의 가능성이 내포된다고 이야기하며,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무의 여지를 늘 남긴다. 내가 해보았던 고민으로 위에서 언급한, “나는 왜 존재하는가”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에 포커스를 두는 역발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무’는 이로 하여금, 존재의 본질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무’는 의식이자 자유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물으면,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과거로부터 분리되어 ‘반성’하는 행위를 했다면, 이미 의식과 존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서로 거리를 둔다. 부정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정된 본질이 있을 수 없다면, 의식 자체는 대상이 아닌, ‘무’이다. 의식의 대상이 곧 특정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철학에서 우리는 미래의 존재에 대한 방향과 사유를 점해볼 수 있게 된다.


레비나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그는 ‘선’의 개념을 끌어와 존재와 무를 증명하는데, “초월의 문제는 존재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존재의 입장에서 본 타자에 대한 표현은 존재와 무를 구분하는 단순한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차이를 가져온다. 즉, 레비나스는 존재 저편에 있는 선을 존재 영역 바깥에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견하여 주체의 존재 유지를 위한 그 어떤 수단적 의미도 내포하지 않게끔 만든다. 결론적으로, 이들 모두는 파르메니데스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며, ‘無’가 결국 존재에 대한 사유의 일부분임을 주창한다. 사유는 취급을 전제한다.

무를 사유의 영역 안에 놓았다면, 그 다음 문제는 존재의 참다움이 되는데, 그것에 다가서려면 무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존재의 정체가 ‘무’인 만큼, 능동적인 개입이 필요하며, 존재와 무가 가진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현대철학은 더더욱 발전해나갈 기미를 제공받는다.



나에게 있어 ‘존재’라는 단어는 그다지 쉽지 않다. ‘존재’는 생각해보면 많은 뜻을 가진 다의어인데, 무엇이 이 시간, 혹은 공간에 “있다”, “없다”를 결정지을 때도 사용하고, 어떤 대상 그 자체를 지칭할 때도 사용하며, 내부 속성이 외부 대상 속에 종속될 때 역시 그것의 존립 유무를 가리키는 역할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존재 역시 존재한다. 존재는 포지션과 이유를 가진다. 그리고 그 존재는 ‘무’를 내포하고, 나는 내가 이전에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무’에 대한 사유영역의 확장, 그리고 지각하는 대상만을 향한 사고 방식이 아닌, 외부의 것들을 향해 눈을 돌리는 연습을 시도해보고 싶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로 하여금 타인을 더 날 것 그 자체로 수용하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세계를 내 나름의 그릇으로 이해하게 만들 것이라 굳게 믿는다. 단지 존재와 무를 이용한 변증법을 구사하는 것이 아닌, 이로부터 어떻게 인간을 더욱 잘 “알아”가냐에 관심을 둔 철학자들의 오랜 노력은 현대의 우리에게 닿아, 새로운 시대의 옷을 입고 발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영혼은 돌보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도 많은 인상을 받았다. 영혼은 이데아에서 온 것이다. 불멸의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한계를 가지지만, 영혼은 죽은 몸을 벗어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다. 보통 사람들은 현생에 집중한다. 죽음 이후는 암흑, 말 그대로 세상의 “끝”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유한함’을 계속 다시 만들어낼 뿐이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진정으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여유를 갖고 현세를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존재한다. “인간들로 하여금 내세에 영원히 살아남을 영혼에 몰두하게 만든 나머지, 현세의 현실적 삶을 내세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강등해 버리“는지 모른다고. 한편으로,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이 우리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시의 형태로 노래하는데, 몸이 다치면 이성 역시 비틀거리고, 영혼의 모든 본성도 분해되는 것이라 논하고 있다.


왜 죽음 속에서 영혼과 몸이 동시에 소멸하는 것이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부여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는 죽기 전에는 당연, 죽은 이후에도 이미 죽었기에 ‘죽음’과 마주할 일이 없다. 그렇기에 알려 해도 절대 알 수 없고, 다가가려 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다. 레비나스는 미래와의 독특한 관계인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워버리는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삶이 죽음에 오염되는 일은 필연적이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영혼 불멸에 대해 주창하는 것은 자유인들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워버리고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도록 해준다. 그러나 공포가 제거되면, 불멸에 대한 갈망도 사그라들게 된다. 영혼과 몸이 공존하는 현세를 책임감 있게 잘 살아가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출발이자, 본질이며 이러한 생각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시대는 다시,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나

포스트모던의 "새롭게 보기"가 아닌,


"익숙해지기"로 사유와 죽음에 관한 근거 있는 몽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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