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
"연극은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정념을 정화하지만, 이미 가진 정념은 더욱 부추긴다"("Le théâtre purge les passions qu'on n'a pas, et fomente celles qu'on a")
- 장 자크 루소
18세기의 정치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극이 사회적, 윤리적으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질문하며, 인간의 유흥적 구경거리인 공연이 인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루소의 주장은 연극이 단순히 사람들의 결점과 약점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부각하고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극이 정념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감정을 조장한다고 본 루소는 특히 ‘몰리에르’와 같은 고전 희극이 사회적 결점들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하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교정될 기회를 빼앗는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연극이 인민의 삶과 무대 위 연기 사이에 분열(la scission)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배우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 허구적 재현(la représentation)에 불과하며, 관객들은 이를 통해 덕성있는 행동보다는 단순히 재미와 감각적 만족을 얻는 데 그친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연극은 삶과 유리된 허상적 행위로서, 삶의 본질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한다. 이는 루소가 연극을 부정적으로 보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싶다.
루소가 주장하는 삶과 허상의 분열은 오늘날 연극이나 영화, 심지어 디지털 콘텐츠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분열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허구는 현실을 투영하는 동시에 현실을 재해석하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 결점과 약점을 조명한다면, 이는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구경거리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
루소는 연극 대신 대중적 축제와 공공적인 오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활동들이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고, 선한 풍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구경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대중적 축제는 참여자들에게 단순한 관람을 넘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연극과는 다른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루소의 의견에 일부 동의한다. 대중적 축제나 공공 오락은 모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배우 간의 분리를 최소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연극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한다는 의미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극 역시 공감과 참여를 통해 대중적 축제와 유사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구경거리가 관객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연극과 영화, 유튜브, 그래픽 영상 등 다양한 시각 매체는 루소가 비판했던 ‘연극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다. 최근에는 관객참여형 예술을 지향하는 추세로 접어들어, 연극에서도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등의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꼭 극예술이 아니더라도 이는 적용된다. 현대음악의 대가 중 한 명인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자신의 음악 ‘4분 33초’를 아무런 음과 박자 없이 작곡하여 관객이 당황하는 순간의 소리를 ‘무대’라는 공간 안에서 새롭게 담아내는 방식으로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구경거리의 ‘수동적’ 이미지를 ‘주체적’ 이미지로 역전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디지털 콘텐츠는 신체적 실재보다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표현에 의존하며, 이는 루소가 경계했던 "삶과 허상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루소가 강조했던 대중적 축제와 같은 참여적이고 실질적인 경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대중은 자신이 원해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향유 대상이 사실은 확증편향과 선별효과 등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에 봉착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연극을 분리해낼 줄 아는 비판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로 인한 결과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 맹목적으로 시대에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 이상 타인에게 관심과 공감을 내어주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좋은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
연극, 예술, 구경거리로 하나되는 인간은 꼭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하지 않더라도, 같은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에 열려있는 ‘참여자’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시각
: 정치와 예술은 만날 수 있을까?
정치와 예술은 역사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다. 예술은 권력을 비판하거나 찬양하며,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 대중의 정서를 움직이는 강력한 도구였다. 루소의 생각은 이러한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파고든 사례로 대표될 수 있다. 그는 연극이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대중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비판하며, 수동적인 구경거리의 역할과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이러한 루소의 논의를 기반으로 현대 미디어가 정치와 예술의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찰하며,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 도구로서의 ‘미디어’의 역할을 분석해보고자 하는 목적에 다다랐다.
루소는 연극이 대중적 오락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지만, ‘정념’을 올바르게 교화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연극이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허구적 재현에 불과하며, 정치적 책임보다는 도덕적 분열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 연극이 귀족적 취향과 오락 중심으로 소비되던 맥락에서 비롯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루소는 연극이 나쁜 풍습을 비웃음으로써 사회적 결점을 교정할 기회를 잃게 만든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그의 비판은 예술이 단순히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교화와 대중적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술은 단순히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대중을 교육하고 공동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루소가 비판한 연극의 자리는 영화, 유튜브, 그리고 SNS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오락적 기능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예술적 표현을 통해 권력을 비판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루소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미디어 역시 많은 문제를 동반한다. 첫 번째, 영화와 유튜브 같은 미디어는 허구적 서사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루소가 비판했던 연극의 재현 문제와 유사하게 현실과 분리된 표상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영화나 영상 콘텐츠는 강렬한 시각적 효과로 대중을 자극할 수 있지만, 실제 정치 참여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되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비현실적인 망상을 북돋아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을 일삼는 대중만을 양산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루소는 연극이 감정을 부추기지만 이를 교화하거나 사회적 유익으로 연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오늘날 SNS에서도 관찰된다. SNS는 분노, 공포, 흥분과 같은 정념을 자극하여 정치적 이슈를 확산시키지만, 대화와 숙고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중요한 ‘침묵의 나선 이론’도 마주할 수 있는데, 내가 다수의 입장에 서있을 때는 한껏 떠들던 사람들도 자신이 소수가 되는 것은 무서워 소신을 내세우지 못하고 숨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의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본능을 뛰어넘어, 범세계적으로 우리를 연대시키는 매체는 사실, 거의 유일하게도, 예술이다. 루소는 예술과 정치가 대중적 참여와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시대의 미디어는 이를 실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한계를 가진다. 한편, 예술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나 다큐멘터리, 유튜브 콘텐츠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을 다룬 영화는 대중에게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각인시켜 대중의 실천적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세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미디어가 지나치게 상업화되거나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사용될 경우, 대중은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거나 의식적으로 무관심해질 수 있다. 가끔은 ‘PC주의’도 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원작을 완전히 왜곡해서 다른 인종이 본래의 캐릭터를 연기하게 만든 ‘흑인 인어공주’의 경우가 있었다.
이는 대중에게 온전히 설득되기에는 무리였고, 이는 결국 루소가 비판했던 연극의 한계가 현대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루소는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술이 정치와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는 한편, 연극이 허구와 현실의 분열을 초래하고, 대중적 참여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현대 미디어에도 적용될 수 있는 통찰이라고 본 나는 미디어가 가진 본질적인 특성은 ‘다의성’이라 생각한다.
미디어는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것의 의미를 갖는다. 예술에게 주어지는 검열과 자유의 정도는 결국 시대와 맥락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예술이 올바른 정치를 위해 사회적 참여를 펼칠 의무, 그리고 미디어가 그것을 뒷받침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통감한다.
이렇게 루소의 생각으로부터 현시대의 시각을 덧붙여보면서, 오늘날 미디어는 정치적 메시지 전달과 대중의 참여를 이끄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 과정에서 허구적 재현의 위험성과 정념의 조장이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느낀다.
특히 미디어는 단순히 감각적 자극이나 오락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적 토론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예술과 미디어는 정치적 책임과 윤리적 의무를 동반해야 한다. 루소가 제안했던 대중적 축제의 형태처럼, 현대 미디어도 대중과 공동체를 연결하고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짊어졌다.
여기,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소는 연극이 사회적, 윤리적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며, 대중적 축제와 공공 오락이 보다 나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그러나 나는 ‘연극’으로 비유되는, 즉 특정 예술이 허구적 재현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성찰과 공감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식이든 관객에게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고, 삶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은 현대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며, 구경거리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고민의 지점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References
이충훈 (2009). “루소와 축제 -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와 이후 저작에 나타나는 시민 축제에 대한 연구”. 한국프랑스학논집 66. 한국프랑스학회: 251–84.
Rousseau, Alembert, and Jean Le Rond d’ (1996). “Politics and the Arts : Letter to M. D’Alembert on the Theatre / Jean-Jacques Rousseau” ; Trans. with Notes and Introd. by Allan Bloom.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