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와 '무엇을'은 다르다.

매체와 메시지의 교차점에서

by young



‘어떻게’(‘How’)와 ‘무엇을’(‘What’)은 다르다.

그러므로 전자를 의미하는 매체와 후자를 의미하는 메시지는 다른 층위의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관점을 통해 매체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작동하는 것을 넘어, 매체 자체가 메시지의 본질로 기능하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 매체는 정보의 이동 경로를 넘어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가 매체와 상호작용할 때 경험하는 효과와 변화는 곧 또 다른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매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단순히 메시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 자체의 종말을 암시한다”라고 주장한 장 보드리야르는 매체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기에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전통적인 매체의 역할이 쇠퇴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매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기존의 TV나 신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보인다. 이로 인해 과거의 매체가 가지고 있던 권위가 점차 약화되고,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보드리야르가 위 관점으로부터 매체 자체의 종말까지 엿본 것을 통해 현시대에서 우리가 매체, 그리고 그 속의 메시지를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의미체계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의문에 도달했다.


이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매체와 메시지의 상호 작용에서 이루어지는 질적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들의 존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토론토,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버밍엄 학파의 주요 이론과 연관지어 매체와 메시지가 동일시됐을 때의 한계,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 방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매체이고, 어디까지가 메시지일까? 예전처럼 종이쪽지를 새의 발에 묶어 소식을 전달하는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실 메시지와 매체는 어느 정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띠고 있다. 매체라는 과정을 통해 담기는 메시지는 매체가 가진 대역폭이나 시공간적 한계를 만나 어느 정도 왜곡되고 변형된다는 점은 우리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매체 역시 메시지의 영향을 받는다. 특정한 메시지가 계속해서 담기는 매체는 더 이상 원래의 취지를 가진 매체가 아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만 같은” 매체로 전락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이제는 일론 머스크가 개명한 ‘X’로 잘 알려져 있는 본래의 ‘트위터’는 기존에 사람들에게 빠른 소식과 친목을 도모하는 일반적인 SNS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X’는 짧은 문구로 강렬한 정치적 성향을 담아 논란을 만들거나, 연예인이나 소위 ‘음지’ 콘텐츠를 공유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되었다. 매체는 사람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그 모습을 상이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유동적이다.


이는 꼭 인터넷상에서의 문제만을 포괄하지 않는다. 미적 가치 판단을 야기하는 예술의 경우를 들여다보자. 예술은 메시지임과 동시에 매체이며, 매체임과 동시에 메시지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예술은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 음악이 인간의 청각을 자극하는 예술이라면, 미술은 시각을 자극하는 예술이다. 또, 듣는 음악을 넘어 공연장에서 “보는” 음악도 존재할 수 있을뿐더러, 보는 미술을 넘어 미술의 감촉과 향을 “느끼는” 미술도 존재할 수 있다. 그만큼 작가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메시지를 만들며, 또 이 메시지가 의도치 않게 다른 매체의 형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할 만큼 유연한 경계선 위를 넘나드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라스웰이 제시한 ‘SMCRE’ 모델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SMCRE’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순환적 방향을 잘 설명하는 모델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메시지와 메시지가 전달되는 통로, 그로부터 발생하는 효과와 발신자에게 되돌아가는 피드백이 명확히 구분되어있다. 이제는 예술이 아니더라도 매체와 메시지가 구분될 수 없는 시기가 도달했고, 이로써 메시지와 채널이 구분되지 않음은 더 나아가 메시지를 보내는 송신자와 받는 수신자조차 구분되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21세기는 참여문화의 시대이다. 자신의 생각을 언제든 유튜브나 SNS에 게시해도 모두가 그 정보를 공유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기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 동시에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하며, 받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보내는 사람이 되어있기도 하다. 나는 매체는 ‘날씨’가 아닌 ‘주식’을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날씨를 예로 들어보면, “내일 전국적인 비가 예상됩니다”라는 기상캐스터의 말로 인해 실제로 비가 내리게 되는데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그러나 주식에서 “내일 00회사의 주식이 오를 것입니다”라는 투자 전문가의 말은 실제로 다음 날 주가를 상승시키는데 영향을 미친다.

매체도 마찬가지이다. 매체는 그 변화를 야기하는 사람들의 미묘한 가치관의 변화, 예상과 기대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민감하고 빠르게 자신의 모습을 달리하며 인간, 그리고 이 시대와 상호작용하는 것도 바로 매체라는 말이다. 이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도화지처럼 반응하는 매체는 ‘자기 PR’ 시대라고도 불리는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 있다. 좋게 이용하면 더 많은 사람과의 소통을 도모하지만, 나쁘게 이용하면 오히려 근대 최고의 실수인 ‘마녀사냥’을 되풀이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토론토 학파,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리고 버밍엄 학파의 한계를 넘어


토론토 학파, 특히 마셜 맥루한은 “매체가 메시지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매체가 인간의 지각과 사고방식을 구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맥루한의 관점에서 매체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창조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매체 자체가 인간의 감각 비율을 재구성하는 것에 집중한 그의 연구는 특정 기술이 인간에게 촉진하는 경험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활판 인쇄술은 논리적 사고와 개인주의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자 매체는 범세계적 시민의식을 형성했다. 맥루한은 매체의 영향력을 강조하지만 그 종말을 예견하지는 않는다. 반면, 보드리야르는 현대 매체가 과잉 정보와 ‘시뮬라크르’, 즉 모사물의 확산을 통해 매체와 메시지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결국 매체의 기능 자체가 사라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화 산업을 통해 대중매체가 대중을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들어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고 보았다. 벤야민 역시 “정보의 상품화”와 “지적 노동이 정보 산업에 예속”되는 현상을 고찰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단순한 오락 제공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적 소비를 지속적으로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관점은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메시지가 사회적 통제와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현대 매체가 단순히 지배 이념을 전파하는 역할을 넘어, 모사물을 통해 현실을 대체하고 소비사회를 극대화한다고 본다. ‘디즈니랜드’를 예로 들면, 이는 단순한 오락 장소가 아니라, 현실이 허구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체는 점차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며, 그 결과로 매체 자체의 종말을 예견한다.


마지막으로, 버밍엄 학파는 대중문화와 매체를 단순히 억압적 도구로 보지 않고, 대중이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했다. 스튜어트 홀의 ‘부호화와 해독’ 모델은 매체 메시지가 수용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소비되지 않고, 문화적 맥락에 따라 능동적으로 해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현대 매체는 ‘하이퍼리얼리티’를 통해 대중의 능동적 해석의 여지조차 소멸시켜 현실과 허구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능동적 해석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하기보다는 매체에 의해 제공된 ‘시뮬라크르’ 속에서 방향을 잃고, 결과적으로 매체가 제시하는 현실에 종속된다. 이는 버밍엄 학파의 낙관적 접근과 상반되는 시각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자신이 원해서 한 선택이 진정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이 꼭 ‘비관주의’의 산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의심해야한다. 너무 쉽게 선동에 휘말릴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에 더더욱이나 침묵의 나선이나 확증 편향을 겪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지 않고 멀쩡하게 자신의 줏대와 소신을 지키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디지털화된 세계, AI의 무분별한 활용, 그리고 VR의 도입은 보드리야르의 주장을 더욱 잘 드러내는 예시가 되어준다. 정보 과잉과 알고리즘, 가상현실에 의해 조작된 현실은 매체 자체가 현실을 규정하고 대체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소셜미디어는 사용자에게 ‘필터 버블’을 형성하며 현실의 다층적 해석을 방해한다. 또한, 가짜 뉴스와 ‘딥페이크’ 기술의 확산은 메시지와 매체의 신뢰도와 의미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더이상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사실은 이제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타인에게 관심과 공감을 베풀고, ‘진실’에 눈을 뜬 자들이 필요할 뿐이다. 이러한 환경은 보드리야르가 주장한 ‘시뮬라크르’ 사회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준다. 온라인 리뷰에서부터 논설문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담은 매체 환경은 메시지의 소멸뿐만 아니라 매체의 상업적, 정치적 왜곡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의 경고를 재증명한다.


결론적으로, 보드리야르는 단순히 이 시대 속 메시지의 소멸을 넘어 매체 자체의 종말을 경고했고, 이는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맥루한의 매체 중심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적 이론, 버밍엄 학파의 수용자 중심 이론과 보드리야르 주장의 비교를 통해 현대 매체 환경에서 그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보드리야르의 우려 섞인 주장에 동의하고, 현대 사회가 매체가 지닌 위와 같은 본질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매체가 메시지를 넘어 ‘현실’을 규정한다. 이러한 변화는 매체의 본질적 의미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동반한다.


이런 시대 속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늘 과잉된 정보 속에서 검색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자신의 의견과 가치관, 취향을 갖출 줄 아는 것이 먼저다. 메시지가 존재하는 한, 이를 매개하는 매체 역시 존재한다. 무언가를 ‘매개’하는 것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 많이, 잘 매개하려고만 하다가 뒷일은 감당하지 못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 바에야 신중하고 제대로 된 정보와 긍정적인 영향력의 확산으로 미디어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마주할 때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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