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n Kaige, <100 flowers hidden deep>
인상적인 영화였다.
이삿짐을 옮겨달라고 하는 아저씨와 평소처럼 일하고 있던 이삿짐 센터 직원들의 모습이 등장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급격한 도시화와 재개발로 인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공터에 도착한 그들은 아저씨로부터 일당을 받아내기 위해 물건이 보이는 척하며 이삿짐을 옮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믿는 대로 보고, 또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아닐까? 육체와 감각에 지배받는 나약한 인간은 처음에는 자신의 신념이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대해서 엉터리로 취급하며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시선을 돌리면 방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결국 믿을 것에 대해 부분적으로 선택하고, 그렇지 않을 것들은 모르는 척하며 배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구나 살면서 예상치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내 신념이 무너지는 사건을 겪기도 한다. 종교와 영화 수업을 들으면서 종교는 꼭 신과 관련한 신념 체계뿐 아니라, 인간이 오래도록 품어온 어떤 믿음을 모두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저씨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믿음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있었지만, 그렇기에 희망에 가득 차 있을 수 있었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화병이 깨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파했고 몰라보게 달라진 동네의 모습을 보고 길을 찾지 못했다. 건물을 다 파헤친 지점으로 다다를수록 더 지리에 능하고, 또 친밀함을 느끼는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향한 무분별한 ‘믿음’에 대한 어떤 비판을 던져주고 있기도 하다.
왜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세상은 더 '나은 것'을 향해 달려갈까? 과연 그 방향이 더 '나은 쪽'은 맞는 것일까? 고민을 부른다.
쨍그랑.
아저씨는 잃는 것에 대한 절망과 슬픔을 한 번에 만끽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일어나 살아나가고, 그들에게 일당도 건넨다.
집터에 남아있던 종을 발견하며 이사에 대한 기쁨을 표출하는 아저씨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모습, 그리고 꽃동네의 진짜 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아저씨가 이야기하던 집의 대문, 화병, 어항 등, 그의 소유였던 물건들은 더 이상 정신병자의 혼잣말이 아닌, 진실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은 그 터에 실제로 있었던 집을 보고,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안 보이는 것들을 보이게 해주고, 언제나 있었지만 없었던 것으로 치부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그 힘으로 많은 이들의 생각을 이끌어내고 의도를 표출하여 세계의 진리를 마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짧지만 강렬했던 이 영화 역시 나로 하여금 그 적은 시간 안에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주위의 것을 보고 느끼는 우리는 믿음이라는 집착을 갖기도 하고 갈등과 오해, 부패 등을 마주하며 사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종교의 힘을 얻어 살아나갈 원동력을 찾기도 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어려움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바뀌는 것에 순응할 줄도, 대척할 줄도 알게 된다.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다져지는 삶의 의지는 아저씨처럼 순수할 때도, 직원들처럼 앞만 보고 달릴 때도 있지만 이 둘은 반드시 대조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믿게 된, 혹은 드디어 깨닫게 된 믿음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학문이 생기고, 담론화가 시작되면 무언가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던 내게 (아직은 어렵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끼려는 시도는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