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던 서대문에서 할머니의 막내 여동생, 그러니까 이모할머니가 사시던 화곡동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였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그 길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매일 아침 반복되는 비장한 ‘출근길’이었다.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우리 남매를 정성껏 씻기고 정갈하게 입혀 버스에 태우셨다.
이모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와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큼 얼굴도 성격도 꼭 닮으셨지만 형편은 딴판이었다. 경찰 공무원과 결혼한 이모할머니 댁은 늘 살림이 넉넉했고 풍족했다. 그 집에도 우리 또래 남매가 있었는데, 촌수로는 삼촌과 이모였지만 나이는 우리와 비슷했다. 특히 그 집 딸은 나랑 동갑내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이모할머니는 몸이 그리 좋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동생 몸조리 돕는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데리고 매일 그 집을 드나드셨는데 도착하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그 집 거실에 앉아 계신 적이 없었다. 하루 종일 서서 반찬하고 찌개를 끓이고,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고, 바닥을 닦으며 동생 집 살림을 당신의 집보다 더 살뜰히 돌보셨다.
할머니가 하루 종일 고군분투 하는 동안 거실은 우리들의 천국이 되었다. 또래 아이 넷이 모여 있으니 매일매일이 신나는 축제였고 요즘 말로 하면 공짜 ‘키즈카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하고 나이도 키도 비슷하고 노는 것도 똑같은 친구인데, 꼬박꼬박 ‘이모’라고 불러야 하는 게 못내 억울하고 싫었다. 그래서 가끔은 주제도 모르고 동갑내기 이모에게 발칙한 도발을 하곤 했다.
친척이라 그런지 동갑내기 이모와 나도 생김새마저 쌍둥이처럼 꼭 닮아 있었다. 겨우 몇 달 일찍 태어난 게 전부이건만, 이모는 항렬의 힘을 빌려 나를 야무지게 잡으려 들었다. 툭하면 "언니라고 불러!"라며 군기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고 분수도 모르던 나는 "야!"라고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며 이모의 속을 박박 긁어놓곤 했다. 그건 이모에게 가장 확실한 '발작 버튼'이었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자꾸 야, 야 할래?"
"에 베베베! 싫은데? 싫은데? 메롱이다!"
"너, 우리 엄마한테 다 이른다!"
"일러라, 일러라! 에 베베베!"
그렇게 싸움을 걸고 까불어도 화곡동 집의 어른 중 누구 하나 나를 혼내지 않았다. 심지어 동갑이모 앞으로 들어온 예쁜 원피스나 탐나는 장난감은 결국 내 차지가 되었다. 내가 억지를 부리며 뺏다시피 해도 이모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나에게 다 양보해야만 했다.
지금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집의 최대 피해자는 내 동갑내기 이모였을 것이다. 자기가 누려야 할 사랑과 물건을 굴러들어 온 조카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여동생인 이모할머니에게도 우리는 그저 '아빠 없는 불쌍한 똥강아지들'이었다. 그 가여움이 이모의 억울함보다 컸기에, 이모할머니는 늘 본인 딸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우리를 품어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저녁이 되면 우리를 데리고 서대문 집으로 돌아가야 할 할머니가 우리를 두고 혼자 가버린 것이다.
동생과 나는 화곡동 이모집에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