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 이모 3

by 미뇽작가

할머니는 우리 남매가 기죽을까 봐 동갑내기 이모에게 엄포를 놓으시곤 했다.


"너! 애들 잡들이(엄하게 다룸) 하면 이모한테 혼난다! 애들 울리지 말고 잘 데리고 놀아!"


그러면 동갑내기 이모도 지지 않고 당돌하게 대들곤 했다.


"조카가 '야'라고만 안 하면 나도 잘해줄 거야! 쟤가 먼저 '야' 했단 말이야!"


하지만 바비 인형 삭발 사건으로 우리가 야반도주하듯 서대문 집으로 돌아간 뒤 화곡동 집에는 한바탕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었다. 이모할머니는 자기 딸을 앉혀놓고 처음으로 우리의 사정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셨다.


미뇽이 남매는 아빠가 하늘나라에 계시고, 엄마는 멀리 공부하러 떠나서 할머니가 혼자 힘들게 키우는 중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해줘야 한다고 말이다.


며칠 후, 다시 찾은 화곡동 집에서 동갑내기 이모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자기가 일러서 내가 집에 갔다고 생각했는지, 이모는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극진한 대접'을 시작했다.


자기가 아껴둔 젤리와 과자를 한 움큼 가져와 내 입에 쏙쏙 넣어주는가 하면, 노는 내내 내 안색을 살피며 챙기는 것이었다. 고작 여섯 살짜리가 말이다!


압권은 놀이터에서였다. 같이 신나게 놀다가 동네 아이가 실수로 나를 밀치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난 동갑내기 이모가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누구야! 누가 감히 내 조카를 건드렸어! 당장 사과해!”

자기보다 덩치가 큰 아이 앞에서도 이모는 당당했다. '언니라고 불러!'라며 군기를 잡던 무서운 텃세꾼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디가드이자 대장이 되어 우리 남매를 지키고 있었다.


아기가 아기를 엄마처럼 챙겨주었다.

. 우리 남매는 자연스럽게 이모를 대장으로 모시는 자발적 졸병이 되었고, 서대문과 화곡동을 잇는 무적의 삼총사가 되었다.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저녁이 되어 헤어질 시간이 되면 우리는 대문 앞에서 눈물바람을 하곤 했다. 결국 동갑이모가 우리 집으로 따라와서 자고 다음 날 아침 할머니가 아이 셋, 나중에는 이모네 오빠까지 넷을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 화곡동으로 다시 '출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그 '화곡동 출근‘은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현실 앞에 마침표를 찍었다. 각자의 학교생활에 치여 서로 만나기가 힘들어 명절이나 가족모임 때나 만나는 귀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할머니는 증손주를 데리고 종종 화곡동 나들이를 가셨다. 바쁜 삶에 치여 친척 행사에 소원해졌던 내가 다시 그 동갑내기 이모를 만난 건 어느 친척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세월이 덧입혀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하게 웃었다. 각자의 남편을 곁에 두고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모가 남편의 팔을 살짝 당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보, 알지? 인사해. 내 조카야."


그 한마디가 어찌나 가슴 벅차게 좋던지!

나 역시 남편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보, 인사해. 내 이모야! 내 동갑내기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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