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 이모 2

by 미뇽작가

화곡동 이모할머니 댁은 명실상부한 친척들의 중심지였다. 막내였지만 가장 크고 넉넉한 집을 가진 덕에, 제사나 잔치는 늘 그 집 몫이었다. 하지만 집의 크기보다 더 넓었던 건 이모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친척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들까지 수시로 드나들며 밥을 먹고 가는, 정이 넘치는 사랑방이었다.


그 집에 할머니가 우리만 두고 가셨다. 처음 며칠은 그저 신나게 노느라 할머니를 찾을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다 되어가자 어린 마음속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왜 안 오지?

우리를 여기 버리고 간 건가?'


이모할머니 식구들은 내 불안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평소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우리를 돌봐주었다.

나를 매일 쥐 잡듯이 군기 잡던 동갑내기 이모도 아끼는 바비 인형들을 선뜻 내주며 다 양보해 주었다. 우리 집엔 하나도 없던 그 예쁜 바비 인형들... 평소라면 꿈도 못 꿀 보물들이었지만, 실컷 만지고 놀게 해 줬다.


기다림이 지루함으로, 다시 지루함이 알 수 없는 화풀이로 변하던 어느 오후였다. 나는 동갑내기 이모가 가장 아끼던 금발의 바비 인형 머리카락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그 모습을 본 동갑이모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자기 엄마 (이모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이모할머니는 서럽게 우는 딸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셨다. 항상 내 편만 들어주던 이모할머니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락없는 '동갑 이모의 엄마'였다.


그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억눌러왔던 내 마음의 둑이 와르르 무너졌다. 누구 하나 나를 꾸짖지 않았지만, 내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방 안에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흐느꼈다.


“에고... 우리 강아지... 우리 미뇽이 왜 울어?. 할머니 생각나서 그래? 에그그...”


. 잠든 줄 알았던 이모할머니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다가와 나를 품에 안으신 채 토닥여주셨다. 할머니와 쌍둥이처럼 닮은 그 목소리, 그 품의 체온, 그 살냄새...

너무나 우리 할머니 같아서, 하지만 진짜 내 할머니는 아니라는 사실이 더 서글퍼서 나는 이모할머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이모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잠들 때까지 달래며 안아주셨다. 그 온기에 취해, 나는 울다 지쳐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분명 화곡동 이모할머니네 집에서 울며 잠들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익숙한 서대문 우리 집 천장이었다. 코끝을 맴도는 오래된 가구 냄새, 그리고 부엌에서 들려오는 투박한 도마 소리.


꿈이 아니었다. 울다 지쳐 잠든 그 밤, 이모할머니의 전화를 받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한달음에 화곡동으로 달려오셨다. 버스도 끊긴 그 야밤에, 금쪽같은 택시비를 들여 잠든 우리 남매를 하나씩 안고 서대문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할머니.. 그 때 왜 우리만 화곡동에 두고 갔어?.“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잠시 그 집에 너희를 맡겨두고, 할머니는 빌딩 물청소를 하러 다녔어. 몸은 고돼도 일당이 짭짤해서 며칠만 더 버티면 너희 맛있는 거 사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동생한테 전화가 온 거야. 애가 할머니를 찾으며 울다가 잠들었다고.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미어지더구나.”


할머니는 잠시 먼 곳을 보시더니 덧붙이셨다.


“돈 몇 푼 때문에 내 강아지들을 그렇게 울릴 수는 없었어. 그 길로 할아버지를 깨워서 화곡동으로 달려갔지. 잠든 너희 얼굴을 보는데 얼마나 미안하던지... 다시는 내 새끼들 남의 손에 안 맡긴다 다짐하며 안고 나왔어.”


화곡동 이모할머니네서 호의호식하며 보냈던 그 2주가 내게는 ‘키즈카페’였을지 모르지만, 할머니에게는 생전 해본 적 없는 거친 일을 하며 자존심을 씻어내던 인고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가난했다. 아빠는 부재했고, 엄마는 멀리 떠나 있었으며 할아버지사업체는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내가 가난했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당신들의 뼈를 깎아 가난이라는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셨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이 들이쳐도,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는 그저 따뜻한 이불속에서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소중한 ‘강아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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