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내 남편 2

남편은 호구였다.

by 미뇽작가

처음 할머니와의 합가를 제안했을 때, 남편의 반대는 완강했다.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20대의 어린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고, 못다 한 학업까지 이어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절실한 도움이 필요했다.


우리 곁엔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는 따로 살 때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같이 일어나 언덕 너머 우리 집까지 출퇴근하며 아이를 돌봐주셨다. 아이가 자라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던 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방을 마련해 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정성껏 준비한 새 이불을 덮으며 "다 늙어서 새로 시집온 것 같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1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세 식구와 할머니는 여행을 다니고 쇼핑을 즐기며 알콩달콩한 일상을 쌓아갔다. 할머니는 그 소소한 행복을 매일같이 친척들에게 전화해 자랑하곤 하셨다.


“나 이번에 제주도 다녀왔잖아. 우리 미뇽이 가 비행기 태워줘서 그 귀한 갈치회도 먹었어. 어찌나 싱싱한지 하나도 안 비리더라. 아 참, 동생 그 영화 봤어? <왕의 남자>! 우리 미뇽이 가 매주 극장에 데려가잖아. 역시 영화는 큰 화면으로 봐야 기가 막힌 법이야! 뭐? 뷔페에서 생일잔치를 했다고? 우리 미뇽이는 나를 특급 호텔에 데려가더라고. 스테이크가 입안에서 살살 녹아. 그래, 손녀 키운 보람이 있어. 나를 이렇게나 챙긴다니까, 호호호!”


할머니는 내가 해드리는 모든 것을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셨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자랑 뒤에는 할머니만의 치밀한 '이중 전략'이 숨어 있었다.


“아이고, 자식들 다 키워놔 봐야 소용없어. 아들 다섯에 딸 하나, 손주들까지 애지중지 키웠어도 늙은이한테 용돈 한 푼 주는 놈이 없네. 늙으면 다 짐이지 뭐….”


할머니가 이 서글픈 ‘동정 멘트’를 한 번 날리면 집안엔 비상이 걸렸다. 삼촌들은 삼촌들대로, 사위는 사위대로 ‘나라도 챙겨드려야지’ 하는 부채감에 휩싸였다. 우리는 서로 모르게 할머니의 주머니에 슬쩍 봉투를 찔러 넣어 드렸고, 할머니는 그때마다 못 이기는 척 봉투를 거둬들이셨다.


보너스라도 생기면 나 몰래 할머니 용돈부터 챙기는, 눈치 없고 순진한 남편이 단연 할머니의 '최대 고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나를 조용히 방으로 부르셨다. 그러고는 보물단지처럼 숨겨둔 통장을 슬쩍 보여주시는데,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히히, 미뇽아. 나 돈 엄청 모았지? 그렇지? “


통장에는 그동안 우리가 경쟁적으로 바친 정성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할머니는 천진하게 웃으며 승리의 비결을 속삭이셨다.


“아무도 안 주는 줄 알아야 애들이 서로 나 불쌍한 줄 알고 돈을 더 주지. 안 그래? 히히.”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당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척하며 자식들의 효심에 불을 지피는 박 여사님의 고단수 전략에 나는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그중에서 내 남편이 가장 큰 ‘호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저 모른 척했다.


사실 할머니는 그런 손주 사위 이 서방을 유독 예뻐하셨다. 친자식들에게도 해주지 않던 생일상을 이 서방 생일이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주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편찮으셨던 남편은 평생 처음 받아보는 화려한 생일상에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해하곤 했다.


우리가 지방 발령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이제 혼자 살고 싶다며 서울에 남으셨다. 이제 아이도 컸으니 너희끼리 재미나게 살라며 고집을 부리셨는데, 사실은 동네 친구분이 “미뇽이 부부가 형님이랑 같이 살아서 둘째가 안 생기는 것”이라며 툭 던진 말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를 보내고 할머니는 적적하고 외로운 밤을 홀로 지키셨다.


지금도 남편과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하곤 한다.


“할머니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는데… 이제 그 맛을 볼 수 없다는 게 참 아쉽네.”


남편의 나지막한 그리움 섞인 한마디에, 우리 집 거실을 가득 채웠던 할머니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