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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Nov 16. 2022

오필리아와 마법의 거울

상성력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낯 익은 것의 또 다른 모습 그러니까 알고 있는 것을 내 방식으로 낯설게 만드는 힘을 말한다.  <오필리아와 마법의 거울> 처럼 보여지는 것들을 처음 본 듯 낯설게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본질을 찾아 헤매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좋은 상상력이다.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아내는 힘이 곧 상상력이다. 303년 전 마법사의 선택을 받아 떠나는 여행처럼 303년 전을 모티브로 해서 떠나보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있는 것으로 부터의 출발이다. 모든 관찰과 사색은 나로부터다.


아이들에게 나는 상상력을 가르친다. 끊임 없이 생각을 꺼내게 하는 일이다. 어찌보면 상상력을 가르치는 것이 모순이 있지만 어떻게든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며 무엇이든 생각을 꺼내주는 일이다. 생각에 날개가 달렸을 때 비로소 아이들과 하나가 된다. 책을 읽고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꺼내어 각자의 풍선을 만들어 터트려본다. 고정관념이 생기지 않도록 생각에 근육을 달아주는 일이다. 그것은 억지의 생각으로는 되지 않는다. 억지의 맞춤형 생각이 아닌 자신의 일상을 자신의 독서 창고를 개방하여 부자연스럽지 않게 자신을 꺼내놓을줄 알아야 한다. 어릴적의 생각날개는 성장하면서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훈련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자연스럽고도 최대한 공정하고 냉정하게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을 캐어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일이다. 그러다가 신선한 문장과 단어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함께 환희를 느낀다. 아이들의 상상력에 귀를 기울여본다. 빗물과 빗방울이 결혼을 하고 빗물이 빗방울을 업고 가고 빗물이 빗물을 밀고 가고, 몸으로 오는 상상력, 직접적인 단어와 단어, 그 속에서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백석이 활동하던 1930년대 후반 내가 태어나기 40년 전이지만 백석의 흰 바람벽을 그림으로 드로잉 해 본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상상해본다. 눈에 푹푹 빠지며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까 얼마나 간절히 손꼽았을까. 사랑하는 애인이 내 곁으로 오기를 말이다. 백석은 그 시대의 모더니즘을 노래하던 시인이다. 그 시기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학적 표정을 모던하게 그려낸 시인이다. 기형적인 상상력, 도회적인 풍토를 실랄하게 비판하며 모더니즘의 전형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지만 그의 상상력은 감히 따라할 수 없다. 픽션과 팩션을 이미 사용했던 백석의 정신은 21세기의 지금에도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사실(non fiction) 에 상상력을 더하거나 사실이 아닌 것에 상상력을 얹어 창조하는 일. 백석의 힘이다.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 시간부터 욕심과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이해하기로 마음 먹고 내려놓는 순간부터 릴렉스해진다. 내 쪽으로 몸을 틀고 나 혼자 차지하고 나만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게 되면 그제사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물과 현상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분석하고 거시적으로 또는 미시적으로 살펴보는 일. 그러면서 고정화 된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인정하고 정의하는 일. 그것은 본래 무엇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면모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현실화 시키는 상상력이다.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함께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물론 함께 하는 일이란 ’사랑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기도 하다. 행운 같은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이 보물이 되는것 처럼 식욕과 성욕과 모든 욕구는 동행 곧 공존이기 때문이다. 함께 걸으면서 함께 존재하자는 말이다. 멀리서 가져오지 않고 내 주변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가만히 앉히면 곧 상상력이 된다. 단순한 글의 나열이 아니고 지금 나와 동행하는 것, 곧 공존이라는 본질적인 해결책까지 얻을 수 있는 상상력. 시간과 공간속에서 살아가고 시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 상상이고 시(詩)라고 하겠다.


음악을 듣고 언어와 노는 하루하루. 재즈의 리듬처럼 어절들의 짝을 바꾸고 문장과 문장이 춤을 추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이 차오를 때 까지 퍼즐처럼 조각보처럼 맞추거나 끼워 넣기를 반복한다. 온전히 쓰여지는 한 편의 글을 위해 무형을 유형화 하는 작업에 집중한다. 상상력을 총 동원하며 언어와 유희한다. 한 문장이든 한 단어이든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프레임의 주체적인 틀을 가지고 상상이 주는 말을 받아 적고, 쳇 베이커의 달콤한 재즈도 케논 앙상불도 합창소리도 상상력과 믹스하면 빈 여백을 채울 수 있다. 행위에서 감각되어지는 언어들이 살아 움직인다. 고정되어 멈춘 것이 아니 상상력을 통해서 생각을 재단하고 다시 새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고정된 관념들을 깨부수며 전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내 것이 되는 지점에서 환희가 오는 것이다.


길을 가다 불쑥 불쑥 로드 킬을 본다.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되어 허공의 일부가 되는 지점을 본다. 바퀴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생각할 여지 없이 길을 달리지만 하나의 개체가 순식간에 문제가 생기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단 한 조각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일. 신발 한 짝이, 가방에서 빠져나온 소지품들이, 커브길의 시멘트 벽으로 뛰어든 차량이. 아침해장을 하려고 나선 새벽길에서. 육체이탈과 동시에 영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찰나의 긴박감. 너덜너덜 날아가는 홀씨는 우리 모두의 찰나이고 긴박감일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길을 지나면서 찰나처럼 생각이 멈추고 또는 사라진다. 실체적인 경험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것이다. 진지한 상상력을 통해서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흔들리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리는 그렇게 흔들거리며 살아간다. 타인의 것에도 주체적인 것에도 바람이 불자 너덜너덜한 실오라기가 홀씨처럼 날아가는 것처럼. 색다른 희망이다.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대체 여기가 어딘지 또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지하철 계단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약속도 없이 서성일 때가 있다. 길 위에서의 상상력은 최고의 친화력 자화자찬 내지는 최면 같은 것이다. 긴장하지 않고 푸짐한 상상력을 모을 수 있는 모티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 위에서 지치고 길 위에서 아프고 길 위에서 후회하지만 상상력을 찾아내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을 찾아 헤메고 길을 두리번 거리다가 길 위에서 해결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의 푸르른 상상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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