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길

우리는 노마드

by 레이



작가의 길. 노마드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를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해갈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기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


시대의 변화와 가장 무관한 장르로 생각해온 문학조차 점차 장르 자체의 고유성을 잃어가고 문학 종사자들의 수도 줄고 있기는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언어를 비효율적으로 다루려는 문학적 행위와 관련된 인간의 욕망을 결코 줄거나 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밈싱장하다. 이러한 사실은 말과 관련된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대체 불가의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능력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멋지게 초과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만큼은 그 대체물을 찾기가 쉽지 아은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내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한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마치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 꿈속에서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음’ 과 더불어 놀라운 사유를 창조해내고, ‘말할 수 없음’과 더불어 언어 너머 심연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조그만 육체안에는 이처럼 엄청난 말이 존재한다. 우리가 실제로 감지하는 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말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처럼 작가는 기능적인 것으로 퇴화한 언어를 붙잡고 그로부터 진리를 발견하려는 자이다. 막스 피카르트는 이러한 언어는 시인에게 ‘커다른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 하다고 말했다. 말을 그 원천으로부터 새롭게 퍼 올리는 작업은 유혹적이지만, 시인은 말과 더불어 자기 안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심연을 열어젖히는 행위인 동시에 심연을 메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같은 휴혹과 불안 사이에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는 정도는 언어를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과와 달리 시인은 언어를 결코 수단화하지 않고 그것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저 유혹과 불안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자.


인간의 말이 순수해질 때 그것은 그림과 가까워진다. 그림은 ‘인간이 말로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침묵에 대항하면서 말이 ‘최초의 현존’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막스 피카르는 말했다. 말을 배우기 이전 아이의 영혼이 그림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이처럼 침묵에 맞서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려는 순간의 말은 온전히 진실된 것이었다.


그러나 침묵의 그림을 해석해내려는 말은 이미 타락한 것이 된다. 언어에 대한 고민 때문에 시인들은 미술에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해석하면 말할 수 없는 것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침묵의 이미지인 미술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지속하지만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그렇다면 이미 기능어로 전략한 일상어를 통해 그림의 침묵에, 즉 말이 생겨나기 직적의 그 침묵에 다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최초의 진실 된 말을 복원할 방밥이 인간에게 있는는 한 걸까.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 오직 언어로 뚫고 나아가는 사람 언어라는 것이 나에게 주는 어떤 고통이 있는데 그것과 싸우는 게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 같다고 작가 한강은 말했다. 일상의 언어에 대해 불편한 이물감을 드러내는 것은 최초의 말이 지닌 순수성을 회복하고 고통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것이겠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작하듯이 애초에 그림과 말은 분절되지 않는 철학의 공간, 그 기원으로 공유하고 있다. 말과 동거하는 인간으로서 침묵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어진다. s y 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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