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by 잊숙

최근에 그가 질식해 숨이 끊어질 것을 우려한 검은 것은 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자비로운 그것은 그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검은 것의 계획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다.


겐트가 잠시 그의 집에 틀어박혀 간신히 얕은 숨만 내쉬고 있을 때, 검은 것은 불안과 죄책감을 채찍질해 그에게 또 다른 계획에 올라타도록 하였다.


그때쯤 겐트는 그 자신과 검은 것을 구분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제기랄 그것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검은 것은 겐트 스스로보다도 주어진 상황과 주변의 기대를 잘 이해했으며 잘 이용했고 언제나 답을 제시했다.


심지어 그것은 겐트보다도 그의 주변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겐트는 그 어느 때보다 그 자신의 인생을 뚜렷하게 느끼고 이해하려 했으나, 검은 것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겐트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도록 두지 않았다.


보고, 맛보고, 느끼고, 시간이 흐르는 감각 등 모든 감각에 검은 것이 뒤집어씌워져 있었으며,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달콤한 말들과 사랑도 겐트에게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오랜 시간 지속된 그것과의 공생은 겐트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검은 것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깨어난 것은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는 영적인 목적도, 숭고한 목표도 아니었다.


그저 짐승으로서의 생존 본능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알약을 먹고 깨어난 것처럼, 옆 행성 크립톤의 클라크 켄트가 슈퍼맨으로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 각성한 것처럼 깨어났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에게 주어진 메시아와 같은 숭고한 책임도, 슈퍼맨과 같은 초인적인 능력과 정신력 같은 것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클라크 겐트’였다.


세상은 그를 위해 준비한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세상에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태어나고 죽어가듯이, 누구의 기억 속에도 인지되지 못하고 숨어 사는 하수구 깊은 구덩이 속 쥐새끼와 다를 바 없이.


그가 진정으로 분노에 가득 차 가까스로 검은 것의 가죽을 찢어발기고, 고통에 울부짖으며 나왔을 때 그를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반기고 반기지 않고 따위의 것이 아니라, 그가 느낄 수 있는 아무런 단어적 개념도 없었다.


빈 것을 의미하는 공허조차 없었다.


‘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무’였다.


날것의 그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춥고 떨며 그를 휘감는 바람조차 그를 괴롭게 했다.


그 자신의 탄생 자체가 그의 괴로움이었다.


그의 주변 사람과 언제나처럼 차려지는 따뜻한 밥상은 여전히 ‘겐트였던 것’을 향하는 것들이었다.


그를 향한 웃음과 걱정, 사랑과 온정은 그가 일구어낸 것이 아니었다.


검은 것에게 완벽히 굴복해 조종당하던 치욕과 부당함,

노예였던 그 자신의 반증이었다.


해방된 그에게 밀려오는 것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괴로움과 고통뿐이었다.


그는 지나간 시간을 괴로워했다.


그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좋았던 사람들, 미웠던 사람들.

그가 검은 것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많은 모습들, 경험들, 음식들, 장소들, 감정들.


그에게 놓인 의무와 책임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겨진 미래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괴로움이었다.


그 자신만이 홀로 각성한 그는 그저 빈껍데기였다.


소화되고 남은 껍질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통과 후회,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뿐.


그는 잠에 들려고 노력했으나 잘 수 없었다.


알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그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 시간이 어서 끝나기를 기도했으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뜬눈으로 느껴야만 했다.


쉬는 시간은 그의 몸이 피로를 견디지 못해 기절하는 순간뿐.


그의 몸이 몇 시간 기절로 회복되면, 또다시 그의 눈꺼풀을 일으켜 세워 괴로움과 마주 보게 하였다.


눈을 감아도 그의 눈꺼풀 아래에서는 후회가 끝없이 반복 상영되며 그를 괴롭혔다.


그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시간이 그를 끝내주기만을 기다렸다.


무한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검은 것이 계획해 놓은 길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괴로움에 비한다면 그곳은 휴양지에 가까웠다.


검은 것은 그 자신의 생각보다도 옳았고 안전해 보였다.


이제 와서는 무엇이 검은 것인지, 그 자신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검은 것은 그저 자신의 배 속의 충동에 벌벌 떨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나가려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부정한 것은 겐트 그 자신이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그의 망상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는 보잘것없는 그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의 머릿속에 잘 짜인 대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뚜렷하게 무언가 이룬 것이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검은 것과의 투쟁으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어쩌면 눈을 감고 떠나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클라크 겐트, 그 자신이야말로 성실하고 정상적인 그립톤인의 마음속에 자라나는 암덩어리일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루가 한 시간으로, 한 시간이 1분으로, 1분이 1초로, 1초가 셀 수 없는 단위로 쪼개져 멈춰버릴 것만 같은 속도로 그를 지나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