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트의 시선이 우주선 창밖으로 향하였다.
끝없는 어둠.
창밖을 가득 메운 우주.
(그것이 우주의 이름이 맞다면)
그것은 맑고, 투명하게 어두웠다.
그러나 그의 우주선이 지나온 빛의 흔적을
끊임없이, 자신의 어두운 배속으로 삼켜 넘겼다.
마치 자신의 투명한 어둠에 칠해진 낙서처럼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우주는 자비로웠다.
수많은 별들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터전 삼아 살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순간에 그들 모두의 생명과 문명을 거두어 가기도 했다.
그립톤 필수 교양과목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책으로 보고 수업으로 듣는 것과 이 세상의 근원을,
주인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우주는 자비롭지도, 잔인하지도 않았다.
우주는 그저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그에게 펼쳐져있는 무한한 시간과 무관심 속에서 칠했다 지워질 낙서일 뿐이었다.”
겐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순간,
여기 눈이 가려진 채 표류하는 이 작은 배를,
산산이 부숴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겐트의 우주복 안에서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클라크 겐트, 항구를 나서자마자 표류한 선장. 자유의 왕관에 깔려 죽다.”
문득, 그의 묘비명까지 떠올린 순간
우주선의 항로를 조정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는 정신을 차렸다.
적어도 지금의 우주는,
그의 작은 우주선이 나아가도록 길을 내어 주고 있었다.
운전석을 한결 편안하게 조정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기억이 존재하는 어린 시절부터 그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옆 행성 크립톤 사람들처럼 강철 같은 힘도, 하늘을 나는 능력도 아니었다.
그의 초능력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혹은, 스스로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몸짓, 손짓, 목소리, 눈과 입술의 각도.
그들에게서 풍기는 냄새와 옷차림.
그는 그것들을 통해,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하게 해 주고,
그들의 여린 본심에 어울리는 단어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나열한 뒤,
그들이 보고 싶은 표정과 함께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겐트의 작은 목구멍을 산도 삼아 빠져나와 입술을 찢고 태어나는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일단 한번 태어나 생명을 얻은 말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공기 속을 떠돌며 태어난 입술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뿌려진 씨앗이 자라나듯, 말들은 점점 더 그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그가 조금 더 자랐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온전한 생각,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가 과거에 뱉어낸 수많은 말들이 그의 온몸에 덩굴처럼 얽혀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이, 과연 나의 것인가?
그가 걱정 어린 말, 사랑 어린 달콤한 말을 내뱉을 때에도,
그것이 진짜인지, 그저 역할을 연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저 그들이 겐트의 작은 입술에 맡겨놓은 말들을 되찾아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주변사람들은,
그런 겐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겐트도 그들의 사랑에 진정으로 답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없었다.
진심을 잃어갈수록,
겐트의 입술은 더욱 능숙하게 달콤한 말들을 쏟아내었고,
스스로는 부끄러움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검고 끈적한 그것”이 찾아왔다.
그것은,
그가 잠들기 전,
타락한 혀를 더듬이처럼 휘두르며,
그가 미처 이불로 가리지 못한 그의 작은 발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그것은,
그의 방 한구석,
옷장 안, 침대 밑, 그의 시선이 닿는 어둠 속이라면 어디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알 길이 없었고 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지만,
겐트는 그것의 불결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린 그가 낮잠을 잘 때면,
한 손에 끝머리를 쥐고 잠에 들던
어머니의 향이 묻어나는 담요와도 달랐고,
아직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한,
얼마 전 그가 저금통에서 훔친 동전 몇 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 생이 경험한 이해를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겐트는 자주,
그 검고 끈적한 괴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을 어른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놀랍도록 영악했다.
어른들의 커다랗고 피곤한 눈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몇 번의 시도를 거쳤지만
검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끈기 있게 어둠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검은 것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결국 그들은 눈을 돌릴 것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검은 것의 편이었지,
어른들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잠들기 전, 어머니의 사랑을 담은 입맞춤이 이마에 내려앉는다거나,
퇴근한 아버지와 나누는 짧은 대화는 분명 어둠을 몰아낼 만큼 밝고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밤하늘에 터지는 폭죽처럼,
잠시 그의 방을 밝게 비추고 사라질 뿐이었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전보다 짙은 어둠이 채워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검은 것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너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으로, 그를 반기었다.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겐트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검은 그것은 겐트를 가엾게 여겼다.
함부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
자신만은,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것은,
끔찍하리만치 탐욕스러운 동시에,
그 자애로운 눈빛은,
바닥에 더러운 침을 뚝뚝 흘려가며 나를 응시했다.
그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검은 것은 나를 응시하고 관찰했다.
길고, 충분한 시간 동안.
“그것은 나를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