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의 추락 혹은 예정된 결말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by 강민재


나는 고집쟁이였다.



고등학교 입학 직후 등록한 학원을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받았던 영어 등급이 고교 시절 중 가장 높았다.


만회의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최근의 것을 기억한다. 고3 개학 직전 봄방학, 인하대 수학과 재학생에게 무료 과외를 받았다. 한 달 만에 끝났다. "숙제를 안 해온다"는 이유였다.



싹수가 노랗던 시절

이러한 결과는 이미 초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생각건대 '싹수가 노랗더라'는 뜻이다.


어렸을 때 나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또래들과 달랐다. 프로그래밍과 어휘의 중요성을 느끼고, 스스로 주안도서관 일반실에서 파이썬과 한자 2000자 서적을 대출했다.

며칠 만에 독서를 그만두었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인근 단지 아파트 공부방에 사는 고려대 경제학과 학생에게 개인 과외를 받았다. 중2까지 선행을 마쳤다. 그 결과 중학교 수학, 영어 시험에서 100점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학원 선행의 결과임을 나는 무시했다.


그때도 숙제를 안해서 공부방에서 하곤 했으니,
이미 나의 성향은 정해져 있던 것이다.


벼락치기적 자습을 통해 역사, 사회, 도덕까지 모두 100점을 받으니 자만심이 극에 달했다.

결국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에 이르렀다.


예정된 몰락


공부에 욕심이 있으면서도 공부하지 못할 환경에 직접 걸어 들어갔다.

고등학교 입학 직후 등록했던 한 학원에서 원장 선생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다.

"저는 집에서는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밤을 새워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고1 1학기에 수학, 영어 3등급을 받은 이후, 학원비 34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독학을 결심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학원을 그만두었다.


사회, 역사, 정보 1등급

국어 평균 2등급

영어, 수학 평균 4등급


기괴한 고교 내신 2.99는 이러한 비참한 결말이다.

중학교 생활의 연장선상인 것이다.


결국 오늘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공대에도 붙지 못했고, 재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대입 시즌이 되니, 같은 반에 전교 유일 '내신 1.0'인 학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책상 위에는 대치동 대형학원 학습 유인물이 올려져 있었다.


사교육 없이 독학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나친 이상주의였고,
현실을 방관한 한낱 광인의 망상이었다.

학업을 망치게 된 경위

학업 실패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1. 내적 요인 — 개인적인 성향이나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는 원인으로, 학업 능력의 잠재성과 장기적인 방향을 결정한다.


선행 없이 수업만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고집. 이미 훌륭하게 선행을 해놓은 학생들에 맞춰 빠르게 진행되는 학교 수학 수업에서, 예습과 복습의 의무를 저버린 방임. 우선순위와 상황에 맞는 학습 위계를 무시하고 학업하는 행위.


2. 외적 요인 — 매일을 주관하는 습관으로, 단 하루만으로는 경미하나 날마다 누적되는 원인이다.


학업 대신 다른 길에 빠져버린 것.

이를 테면 신문, 일기, 수필, 일본어...
비생산적이라 한다면 웹소설, 웹툰, 포르노, AI 생성 소설...
마지막으로 LLM 기반 비주얼 노벨 개발 등이 있겠다.

특히 1학년 때 스마트폰 게임에 빠져 오랜 시간을 쏟은 것. 2~3학년 자율 야자에서조차 폰으로 논 것.


3. 복합 요인 — 학업 실패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근원적인 요인이다.


개인의 사고에 내재하고 있어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학업을 하면서도 학업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일종의 병변이며 정신 치료가 요구된다.


• 참고서에 등장한 개념에 대해 해당 분야와 관련 없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며 깊이 생각하는 행동
• 학습을 진행하는 도중, 부정적인 정념에 의해 집중이 흐려지고 어중간한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
• 수업을 듣는 도중 수업과 관련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설명을 놓치는 경우


아마도 성인 ADHD일 것이다.

이마저도 중학생 때 인터넷으로 조언을 받았으나, 어머니가 검사에 동조해주시지 않으셨다.


고2 학기 초, LLM 비주얼 노벨 제작 활동으로 반 학생들에게 몇 분 넘게 천재 소리를 들었기에, 학생부 종합 전형으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 KAIST 특기자 전형 — 1초 늦어 제출 실패

• 광운대 1차 — 불합격
• 인하대 1차 — 불합격


• 인천대 1차 — 합격
• 숭실대 1차 — 심사 중


1차 경쟁률이 3:1이면 안 붙고 2:1이면 붙는 것을 보면, 내 생활기록부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학생부 종합 전형조차,
생활기록부의 내용보다 성적이 훨씬 더 중요하다.


숭실대조차 1차 불합이면 내 고교 활동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

그런데 1차 경쟁률이 6:1인 것에서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다.


2주간의 벼락치기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위기감은 지난 2주 동안 나를 수능 공부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벼락치기였으나,

• 인문학 2과목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수능특강
• 'EBS VOCA VACCINE 2200'
• '윤혜정의 개념의 나비효과'

를 학습했다.


그러나 결말은 대실패였다.


수능특강 EBS 강의는 개념 강의였다. 교재 내용 풀이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강사는 칠판에 각 인물별 개념을 설명해주는 동영상이었다.

나는 이를 노트에 정리하는 것이 좋은 줄 알고 받아 적었다.

또한 윤혜정의 나비효과 1개의 강좌가 1시간인데 이를 매일 2개씩 보았다.

10일을 소모했다.


결말은 어떠한가.


우선 노트 필기는 시간이 급박한 상황에서 전혀 쓸모가 없었다. 2주 남은 시간에 수능특강 속 문제들로 개념을 머리에 고정하고, 마더텅 4년 치 기출을 풀어야 했다.

강의는 좋으나, 노트 받아적기라는 방식으로 3배나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그마저도 완성된 노트를 다시 읽는 데 하루를 날렸으며, 그 이후 다시 쓰이는 일은 없었다.


윤혜정의 나비효과를 듣는 것도 전혀 소용없었다.

애초에 이번 수능에서 시간 부족으로 문학 파트(현대시,고전시, 복합지문)를 아예 풀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10일을 문학 개념 강의에 매일 2시간씩 소모한 것이다.


그저께 인하대 의대 1차에 합격한 친구가 얼마전 나에게 조언해주었다.
"윤혜정의 나비효과는 효과 없으니 매3비, 매3문 풀어라."


이 말조차 '이미 절반이나 강의 들었는데, 다 끝내야지'라는 고집으로 이후 4시간 정도 더 들었다.


부족한 것은 개념이 아니었고, 국어 실전 모의고사를 했어야 했다.

잘못된 공부를 한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2022년산 VOCA 단어장을 하루 110단어씩 매일 2시간을 들여 외웠다.

그런데 D-3 때 실전 모의고사를 풀기 시작해보니, 중요한 것은 어휘가 아니라 수능형 독해력이었다.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푸는 방법을 연마하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시작해도 사탐 1등급을 받을 수 있을까?"


수능 D-45쯤 의대 지망생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가능하다.
단, 어떻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한다."


나는 내가 살아왔던 관성 그대로 이것을 무시했고, 평가원의 징벌을 받게 되었다.


수능 이틀 전부터 사탐 수능특강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결국 다 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시험에서는 백분위 80%에 들지 못했다.


나는 고집쟁이이다.


Nov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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