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현실

by 오늘핌

언젠가 친정에 갔을 때, 결혼 3년차인데 이제 여행도 지겹고 주변에서도 슬슬 아기를 낳고 있어서 엄마에게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지 가볍게 얘기를 던졌다.

예상과 달리 엄마는 "낳지마~ 기후변화도 그렇고 점점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이 된다는데. 십 수년 후에도 살만한 환경인가 모르겠다." 라고 건조하게 답했다.


맞벌이 오빠네 부부를 위해 3살된 조카의 어린이집 하교와 새언니의 퇴근 전 공백을 엄마가 거의 매일 돌봐주시며 예뻐해주시는데, 갑자기 기후변화 같은 핑계를 대며 부정적으로 얘기하시는게 조금 의아했고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왜. 조카 안 예뻐? 조카 엄청 예뻐하잖아. 조카 태어난 후로 오빠네 부부도 더 생기가 있는거 같고. 보기 좋던데?"

혹시나 엄마가 지금 황혼 육아도 힘들어서 내 아이는 돌봐주기 어렵다는 뜻으로 돌려 말한게 아닐까? 사는 지역도 달라서 그럴리는 없겠지만.


그리고 예전부터 진작 엄마는 자신은 황혼 육아는 절대 안하겠다고 선언했어서 애초에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뒤이은 엄마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지금은 그냥 마냥 좋을 때지. 나중에 애 사춘기 되서가 문제지. 요즘 애들이 얼마나 약삭 빠른데, 쟤 아빠 귀 안좋다고 놀릴수도 있는거고. 그런걸로 왕따 당하고 애가 상처받을 수 있어."

가볍게 시작한 대화의 끝은 약간 무거워졌다.


나뿐만 아니라 오빠도 난청이 있었고, 속마음을 미주알 고주알 나눌 정도로 친밀한 남매 관계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애로사항에 대해 오빠에게 듣지 못했다.

있어도 나한테 말할 성격도 아니고.

아기를 키우면서 힘든 점보다는 새언니와 시부모 관계에 대해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보는 정도?


하여간 오빠가 이런 상황에 대해 실제로 생각해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속으로만 상상해본 상황이 친정 엄마의 입에서 나오니 이게 정말 현실이겠구나 싶었다. 가족이기에 때로는 더 현실적으로 말할 수 있다.


만약 철저히 타인이라면 그저 '웃으면서 힘내세요. 아직 그렇게 팍팍한 세상은 아니잖아요.' 할텐데.


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고, 그렇기에 머리로는 현실적으로 고민해봐야할 문제에 대해 콕 찝어준 엄마의 말이 당연히 맞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장애가 있으면 낳으면 안되는건가 하는 마음에 살짝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오빠가 엄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물론 오빠에게 오늘의 대화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오빠라면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하다.


현실적인 고민이 결여된 의미없는 따뜻한 위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무엇도 해결해줄 수 없다.


내가 걸어보고자 하는 길에 오빠가 마침 먼저 가고 있었고, 이런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속시원히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 남매는 어릴 때부터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서로의 고민과 걱정을 나눈적이 없었기에 이제와서 이런 고민을 나누는거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고 그럴 마음조차 쉽게 들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춘기를 겪으면서 서로가 창피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장애지만 누가 더 잘 듣나, 누가 더 발음이 정확하나, 누가 더 건청에 가깝나, 하는 은근한 비교 심리가 서로를 멀어지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그런 시기가 지났으니 서로 터놓고 고민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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