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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Dec 12. 2021

#18 라떼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원두를 간다. 홀더에 소복하게 쌓인 커피 가루를 레벨링을 한 뒤 탬핑을 한다. 그리고나서 머신에 홀더를 장착하고 추출을 시작한다. 샷글라스에 부드러운 거품을 머금은 에스프레소가 떨어져 내려 눈금까지 차오른다. 스팀노즐이 마치 기차처럼 칙칙 하고 울어대면, 젖먹이 아이를 달래듯 우유가 담긴 스팀밀크 피쳐를 그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댄다. 쿠우우욱. 노즐이 낮게 울어댄다. 소리만 작았다면 고양이의 그릉거림 같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한다. 아차, 우유가 생각보다 더 뜨거워져 버렸다. 음 겨울이니까 더 뜨거운 것도 좋을 거야. 두 개의 피쳐로 스팀밀크를 왔다갔다 섞는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다. 밀크 피쳐를 기울여 갈색 거품 위에 우유거품을 빙글빙글 흘려보낸다. 잘 섞여 조금 연해진 갈색거품이 어느 정도 찼을 때 커피 잔에 가까이 대고 후욱 붓는다. 하이얀 하트가 떠올랐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도 매우.     


 라떼는 참 맛있다. 씁쓸하고 고소하다. 배고플 때 마시면 속을 꽤 든든하게 채워준다. 차가운 라떼도 따듯한 라떼는 서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졌다. 결론. 둘 다 맛있다. 시럽을 추가해도 달달하니 맛있지만 그닥 선호하지는 않는다. 겨울에는 특히 따듯한 라떼를 좋아하는데, 그것도 특히 추운 아침, 별다방에서 샷 추가에 우유 대신 두유로 넣은 라떼를 마시면 온 몸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진다. 마치 오들오들 떨다 들어간 포장마차의 어묵국물이나 숙취로 고생하다 마시는 해장국 국물처럼.     

 평소에 라떼 주문을 하면 테이크아웃잔 뚜껑을 받자마자 열어보는데, 이는 라떼아트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없으면 없다고 진상 부리려고 보는 게 아니라, 가끔 발견한 라떼아트를 보며 매일 같은 하루 안에서 소소하게 기뻐하고 싶어서다. 부드러운 거품 위에 그려진 백색의 그림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아기자기해지기도 하고 평온해지기도 한다. 귀여운 커피를 잠시 바라본 뒤 입술에 거품을 묻혀가며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 스멀스멀 마음이 행복해져 온다. 바라보는 그 순간이, 따듯한 라떼가 입 안에 머금어지는 그 순간이 특별해진다. 삶에 지쳐 문뜩 본 하늘이 딱 비슷한 모양새다.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흘러가버린 흐릿한 시간의 나열들 속에서 작은 도장을 찍어주는 그런 모습이, 라떼와 하늘은 똑 닮았다.     


 그 날은 참 바쁜 날이었다. 내 업무도 많은데 부탁 받은 업무도 생겼던 그런 날에, 선임도 없었고 심지어는 갑작스레 커피 심부름까지 걸렸다. 점심시간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남았던 참이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배달을 시킬까 했는데, 눈치가 보여 그만뒀다. 결국 은행 업무 볼 껄 바리바리 싸들고 회사를 나왔다. 가지고 있던 현금이 꽤 많아서 먼저 은행을 갈까도 생각했지만 여러 잔의 커피가 나오는 시간을 생각해서 카페를 먼저 가기로 정했다. 점심시간 전에 커피로 배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라떼와 자몽차, 카라멜마끼야또 등등 총 6잔을 시켰다. 그러고 은행을 다녀와야 한다며 10분 뒤에 만들어줄 것을 부탁하고 은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내 업무를 봐줄 창구 직원이 신입이었다. 금방 끝날 입금 업무였는데 그는 30분 째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라떼가, 거품이 죽어간다 하며 속이 타들어갔다. 겨우 끝나서 카페로 가니 음료들은 이미 만들어지고 포장되어 비닐 캐리어에 담겨 있었다. 불안했다. 과연 나의 라떼는 어떤 모양으로 나를 맞이할 것인가.     


 회사에 도착해 캡을 열어보니, 곱고 흰 벨벳거품은-그랬을 꺼라 추정한다-미지근해져버린 커피 위에 작고 동그란 게거품이 되어 둥둥 떠 있었다. 컵 벽엔 거품이었던 연갈색의 자국, 희끗희끗한 자국이 남아, 원래는 자신이 그렇게 컸음을 증명해보였다. 이미 눈으로 실망해서일까 마셔보니 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처리가 늦었던 창구직원도 괜스레 미워졌다가 차라리 은행일 끝나고 갈 걸 하며 맘이 급해 성급하게 판단했던 나를 탓했다. 거품이 죽고 꽤 차가워진 라떼를 보며, 이렇게 타이밍을 놓쳐 꺼져버린 거품이 나에게도 있었나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 직장에서 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끝맺지 못했다. 그분들은 정말 나를 위해 주셨지만, 내 마음이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탓에 좋은 결말에서 멀어졌다. 당시 드라마 미술스탭으로서 촬영을 했던 나는 소위 말하는 ‘번아웃증후군’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전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요령을 피우면서 현장에 소홀하지도 않고 작품에 대한 책임감에 주말에 쉬지 못해도 촬영이 쉬는 날 사무실에 출근해야 되도 큰 불만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몇 개의 드라마를 거쳐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정신도 육체도 고갈되어버렸다. 거기다 현장에선 알게 모르게 무시당하니 조금 위태위태하던 자존감의 담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내 하루를 모조리 갈아 넣으니 나를 위한,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느끼며 일에 대한 불만까지 쌓여갔다. 이게 쌓이고 쌓이다 결국 책임감 없이 갑자기 포기해버리는 못난 방법으로 나는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사장님과 이사님, 실장님은 받지 않는 전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주에도 몇 번씩 하셨다. 카톡도 하셨는데, 나는 숫자가 적힌 빨간 동그라미를 그대로 둔 채 열어보지 않았다. 그저 방 안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나는 참 못나고 겁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실장님의 장문 카톡에 신경이 쓰여 보게 되었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릴 때마다 마음이 꿈틀대 결국 늦은 저녁 한 음식점에서 실장님과 단 둘이 만나게 되었다. 실장님은 먼저 분위기를 편하게 풀어주셨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의 힘든 애기를 물어보셨고 들어주셨다. 그 후에 본인의 아픈 이야기에 대해 입을 여셨는데, 정말로 입을 떼기 힘들었을 마음이, 그 얘기를 들려줄 정도로 걱정해주었던 그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너무 어렵고 괴롭지만 우리 같이, 함께 견뎌보자. 이겨 내보자. 그렇게 말씀하셨다. 진실한 회유에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다시 할 수 있을 거란 용기도 생기게 되었고 마음과 몸이 낫게 되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얄팍한 나의 용기는 한 달 한 달이 지나갈수록 마치 거품처럼 꺼져갔다. TV를 보면서 그때 그랬지 회상도 하고 저건 저렇게 했겠다고 상상도 했지만, 다시 방송일을 할 엄두가 안 났다. 겁이 났다. 다시 방송일을 하면 좋아하는 친구의 결혼식도 또 못갈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달려가지도 못할 것이라며 온갖 핑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고마웠던 감사했던 마음을 뒤로 한 채 기억에서 억지로 지워가며, 나는 또 도망치고 말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지금의 직장에서 일하던 중 전화가 왔다. 사장님의 전화였다. 처음엔 일하느라 받지 못했고, 통화목록에 찍혀있는 사장님의 연락처가 보였을 땐 연락해도 될까 연락하면 어떻게 무슨 말을 드려야 할까 두려웠다. 쇳덩이마냥 가슴 속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외근 중 이동을 하면서 통화목록을 들여다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화를 할까 기나긴 카톡을 쓸까 고민됐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성숙해진 건지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덕분에 내면이 평안해져서인지 부딪힐 용기가 생겼다. 욕을 시원하게 먹을지라도 과거의 잘못에 직면해보자 결심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깜빡깜빡 거렸지만,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친근하게 전화를 받아주신 사장님 덕분에 하고 싶던, 해야 했던 말을 꺼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 한 마디가 무겁고 흉측했던 돌덩어리가 떨어져 나가게 했다. 이렇게 쉬운 말 한 마디를 나는 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걸까. 10여분 동안의 짧은 통화는 함께 웃으며 막을 내렸다.     

 나의 라떼 한 잔은 식었다. 거품도 다 가라앉아 볼품없어 졌다. 버리기엔 아깝고 마시기엔 끌리지 않았다. 차가워진 라떼는 오랫동안 무겁게 짓눌렀다. 차라리 내가 아예 나쁜 사람이라서 죄송함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겠다고 그런 글러먹은 생각도 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전화는 내 못난 라떼를 다른 마음가짐으로 보게 만들었다. 전화는 얼음이 되어 잔 속에 퐁당 떨어졌고, 식어 맛도 없는 따듯한 라떼를 머릿속까지 시원해지게 하는 아이스 카페라떼로 바꿔주었다.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아이스라떼냐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겨울철에도 더운 만원버스에서 지독하게 멀미하다 내려 사마신 아이스라떼를 먹어보지 않은 자, 내게 물어보지 마시라. 오래도록 어지럽고 갑갑하기만 하던 속이 지금 몹시 상쾌해졌으니.








글 쓴 동생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오빠 - 토마쓰리 Thomas Lee




시누이와 새언니

새언니의 결혼식은 특별했다.

반짝이는 웨딩드레스가

웅장한 웨딩홀이 화려해

특별했던 것이 아닌,

백 개의 사랑의 그림으로 가득해

영혼이 반짝이고 웅장해지는

그런 특별한 결혼식이었다.

시누이는 이제 결혼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나 마음이 어수선한데,

특별한 결혼식을 했던

새언니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알지도 못했던 가방순이도 해주겠다며

깔깔거렸고

무엇보다 본인이 제일 중요해요 하고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

새언니의 진심어린 조언을 들을수록

시누이는 특별해져갔다.

소중해져갔다.

시누이에게 새언니 역시

반짝이고, 웅장하며, 특별한 사람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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