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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Dec 11. 2022

#20 밟은 눈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눈을 좋아한다.

눈을 싫어한다.


 이 둘 사이의 경계는 굉장히 아리까리하다. 이러저러한 기억이 눈 뭉치처럼 엉겨있기 때문일까. 어릴 적 눈은 분명히 나를 방방 뛰게 만드는 트램펄린이었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되고 나니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새까만 질퍽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달라졌다. 하얀 눈을 좋아하던 어린이는 까만 눈을 밟을세라 발 뒤꿈치를 세워 걸으며 투덜거리는 깍쟁이가 되어버렸다.


 눈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눈일 텐데, 어른이 된 지금 뭐가 그리도 짜증이 나는 걸까.



하나. 기분 나쁘게 하는 횡단보도 위 거무튀튀하고 꿀렁한 눈 밟기.

하나. 잔뜩 쌓여 정말 정말 조심히 걸어도 운동화와 바지를 찝찝하게 적시는 눈.

하나. 버스 바닥에서 흡사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누군가의 신발에 붙어 무임승차한 검은 눈조각.

하나. 꾹꾹 눌러 밟히고 밟혀 투명한 듯 불투명하고 울퉁불퉁 미끌한, 나를 대자로 슬라이딩하게 만든 산 길의 얼음판.

하나. 깜빡하고 털어내지 못한 롱 패딩 후드 안의 눈 뭉치.


 엄마가 옷도 빨아주고 신발도 털어주고 미끄러져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줬던 꼬꼬마 시절엔 몰랐던 눈의 어두운 부분. 하얗고 밝은 점이 많은 눈이지만, 겪으면 겪을수록-어른에 가까워질수록-좋지 않은 점도 알게 된다.


 어쩌면 눈은 억울할지도 모른다. 눈 스스로에게는 솜털 같은 눈도, 먼지 같은 눈도, 막 내린 뽀얀 눈도, 그리고 아스팔트 위 까만 눈도 모두 그대로 눈일 뿐일 텐데 나라는 작자는 하나하나 다 구분 지어 멋대로 판단해 버렸다. 이른 아침에 만난 하얀 눈과 창밖으로 보는 눈은 좋은 눈. 찝찝하고 물컹한 눈, 미끄덩하게 굳은 눈은 나쁜 눈. 이런 식으로 말이다. 눈에게 입이 있다면 나에게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야, 너는 안 그러냐?"


뾰로통해 있는 눈에게 대답해본다.


"응. 나도 그래. 너처럼 까맣고 하얘. 어쩌면 까만 데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



 옛날을, 아니 옛날이라기보다 스스로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시절을 떠올려 본다. 대체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죄책감과 수치심에 취해 몹쓸 블랙아웃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은 그저 까맣다. 마음이 까만 것처럼 기억도 까맣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이 없듯이 죄악의 기억은 불현듯 나에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을 타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꽤나 선명하게 찾아와 꽤나 아찔할 정도다.


하굣길 슈퍼에서 다른 물건을 계산하며 슬쩍 풍선껌 하나를 쥐던 오동통하던 손.

학원은 어땠냐고 묻던 엄마에게 몰래 땡땡이치고선 수업이 어려웠다며 조잘조잘 거짓말하던 입.

군대 휴가 나온 오빠에게 옥수수 사 가지고 온다 말해놓고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오던 발.

등등등.


 어두운 기억들이 떠오르면 그 전에는 눈 밭의 지평선처럼 평온하던 마음이 짓밟혀 눅눅해진다. 눈이 좀 시큰한가 싶더니 기분이 몹시 더러워진다. 너무도 싫은데 내가 저지른 실수이고 죄며, 내 과거다. 거부할 수 없는 이 놈들은 점점 불어나더니만 항상 하얗고 싶은 나를 비웃는 듯 칠흑 같은 꾸정눈이 되었다.



 그래서 난 내가 싫었다. 반성도 하고 눈물도 쪽 짜냈던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고 머리론 알면서도 에잇 몰라하고 질러버리던 내가 미웠다. 어쩌면 내가 귀신 들린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예 다 모르는 순수하고 깨끗한 나라면 앞으로 다르게 살 수 있지 않나 싶어 최면에 대해 검색도 해봤다. 잘라버리고 싶었다. 까맣고 몹쓸 나는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도려내고 싶었다. 이런 내 맘을 들은 머리가 뭉텅 그동안의 시간을 삭제해버렸나 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들도 좀 없애버린 것 같다. 참으로 야박하고 공평한 머리다.


 그동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 슬프고 아쉽다. 못난 나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싶어서. 좀 더 나를 사랑해줄걸. 보듬어줄걸. 욕하고 외면하는 게 아니라 야단치고 고칠 수 있다고 응원해줄걸. 후회스럽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시간을, 나를 미워하고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과거의 전철을 밟는다면 그동안의 좋고 나쁜 기억이 전부 망각에 빠져 내가 할머니가 됐을 때에 회고록 쓰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인생이 통째로 기억나지 않는다니 너무 구슬픈 삶이지 않은가.



 눈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육각형 모양의 결정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린다. 하얗게 쌓이든 까맣게 밟히든, 봄이 오면 물이 되어 땅 속으로 사라지는 건 똑같다. 진눈깨비도 함박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고, 너 또한 그렇다. 순백의 눈이 되어도 밟은 눈이 되어도 냉혹한 겨울 우리가 세상을 포근히 덮는 존재의 일부분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는 안아보자.





글, 그림 - 율힌 yulhin





거의 일 년만에 찾아뵙는 것 같아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는 작년 겨울부터 결혼 준비를 시작해서 올해 삼월에 결혼하고

지금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신혼생활 중입니다: )

정신없고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오랜동안 글로써 독자분들께 인사드리지 못했어요.

사과드립니다.

이번 글부터는 스스로 그림까지 그려보려고 해서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매주 찾아뵙기는 힘이 들 것 같아요.

그래도 꾸준히 일요일 저녁에 여러분을 만나러 올께요!

감사합니다. 평온한 저녁 되세요.


율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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