좇아 오시는 그 사랑을 깨닫다.
무등산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여전히 변함없는 시골 풍경 속으로 나는 다시 스며들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내 곁에 해처럼 빛나는 아들도 함께한다는 것뿐이었다.
산달이 다 되도록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시어머니가,
며칠 지나지 않아 집을 찾아오셨다.
손자 소식을 전해 들으신 모양이었다.
환한 얼굴로 의젓하게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자, 시어머니의 얼굴엔 금세 만족이 번졌다.
할머니는 기저귀를 조심스레 내려 아들의 몸을 확인하시고는, 연신 얼굴 가득 미소를 터뜨리셨다.
그도 그럴 만했다.
여덟 남매에 단 둘뿐인 아들 중, 큰 아주버님은 이미 딸 둘만을 낳고 단산한 터였다.
결국 우리 아이는 ‘광산 김가’의 대를 이을 유일한 친손자로, 집안의 기대와 기쁨이 한 몸에 쏠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 후로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셨다.
그러던 어느 날, 조심스레 “같이 살면 어떻겠느냐”는 뜻을 내비치셨다.
아들을 꼭 빼닮은 손자를 곁에 두고 보시고 싶으신 마음이 시어머니의 눈빛에서 깊게 스며 있었다.
마침 살던 방의 1년 계약이 만료되어, 방을 비우거나 재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두 칸짜리 방을 알아보시는 듯하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예전에 당신께서 사셨던 주택의 방 두 칸짜리를 계약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며칠 뒤, 뜻밖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단정히 정장을 차려입은 친정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단단히 일러주려는 듯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윗집으로 이사하지 말아라!”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고, 아무리 곱씹어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며칠 동안
왜 ‘그 윗집으로 이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노심초사 했다.
분명한 것은 그 집으로 이사하면 안된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는 선뜻 말씀드릴 수 없었다.
이미 계약을 마치신 상태였고, 신중하신 분이심에,
더군다나 방을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수고를 하신 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저 빈손으로 결과만 바라보는 입장이었기에,
공연히 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불편한 기분을 들게 하는것 같아
그저 마음속에 접어 두고, 꿈으로만 덮어두기로 했다.
이사한 집은 나름 꽤 넓었다.
대문을 넘어 몇 걸음 들어서자, 잘 다듬어진 잔디가 마당 가득 보기 좋게 깔려 있었다.
잔디를 가로질러 안채로 들어가는 유리 미닫이문 앞 계단 까지,
판판하게 다듬어진 둥근 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넓은 뜰 가장자리에는 여러 오래된 나무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무화과 나무는 설익은 열매를 가득 달고 있었고,
-뒷날들, 손에 닿는 열매는 우리의 유일한 간식이 되어 주기도 했다.-
꽃을 나무 가득 피울 만큼 오래된 듯한 고무나무는 그 큰 키로 온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세월을 품고 있는 고목들의 연녹색 싱그러운 잎새 사이로 스미는 햇살이 살랑이는 바람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빙둘러 연결된 뜰에는 아기자기한 꽃들사이로 채 피지 못한 봉오리가
앙증스럽게 맺어 있었고,
뜰의 연녹빛 잔디가, 징검다리 둥근 돌과, 이미 핀 색색의 작은 꽃들과 어우러져
보기 좋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사한 집은 주변의 주택보다는 한결 깨끗하고 단정하면서도 여유가 묻어나는,
집 전체에 초여름의 산뜻한 공기와 온화한 햇살이 머물러 있었다.
나름 걱정하던 마음이었지만, 환경도 좋고, 무엇보다 대문이 있어서 아이들에게도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시어머니도 그래서 이집을 얻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사는 안채는 주변보다 1.5m쯤 높은 지대 위에 지어져 있었다.
마당 잔디 위에서 여러 계단을 올라야만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우리 방으로 들어가는 길은 안채를 오른쪽에 두고 뜰 가장 자리로 길게 세면 바닥으로 이어졌다.
안채와 구별되는 마당 구석 한켠에는 수도 대신 우물이 있었고,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그 우물 물을 생활수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무화과 가지 사이로 오르는, 우물 옆 벽 양철 계단을 다 올라서면
세탁물을 말릴 수 있는 꽤 넓은 옥상이고
그곳에 서면, 시원하게 트인 주변 풍경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잊어버릴만 하면 내려오는 그는 늘 빈손이었다.
서울생활이 녹록지 않은지,
오히려 재료비니,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시어머니께 계속 돈을 빌리기 일쑤였다.
아들의 태도와 생활 환경을 지켜 보시던 시어머니는
어느 날, 결심하신 듯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일을 해야겠다.”
생활력이 강한 시어머니는 그렇게 연세에 개의치 않고 식당에 취직하셨다.
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시며, 주에 한 번씩 집에 오셨는데
올 때마다 반찬을 이것 저것 조금씩 챙겨 오셨다.
그럴 때만 몇 끼니 동안 반찬이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고추장에 비벼 먹거나, 건더기 없는 된장국이 전부였다.
그러한 생활이 이어지면서, 모유량은 점점 줄었고
내 몸은 이유를 모르게 쉽게 지치기 시작했다.
대문 안의 공기는 하루 종일 적막으로 가득했다.
세든 가구는 우리 가족을 포함해 네 가구가 사는 듯했으나,
각 가구의 한두 사람만 간혹 볼 수있었고,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과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줌마는 다른 곳에 살고, 아들 둘은 서울에서 유학 중이며, 아저씨 혼자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다.
일상 속 유일한 대화 상대는 세 살배기 어린 딸과,
큰 눈으로 말하는 아들뿐이었다.
펌프로 우물물을 길어 아이의 기저귀를 빨고, 세탁하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로서,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집 근처 150m 반경에 있던 넓은 파밭이 파헤쳐지며 공사가 시작되었다.
작업 중 공사장에서 지하수를 끌어 올려 사용하는 탓인지,
지대가 약간 위인 우리 집 우물 물이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탁을 하려면 오전 내내 기다려야 했다.
어느 날, 궁금증으로 우물을 덮고 있던 나무 뚜껑을 열어본 순간,
나는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우물 안 둥근 벽을 따라 귀뚜라미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세상에… 이 물을 끓이지도 않고 음료처럼 마셨다고…!”
뜻밖의 상황앞에 아연실색했고, 온몸으로 잔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땅속에서 막 퍼올린 그 시원한 물은, 지친 몸을 버티게 해주던 유일한 음료였는데,
더이상 그 어떤 갈증도, 허기를 달래주던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식수는 주인집 주방에서 전기로 끌어올리는 지하수로 대체해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신체적 조건도 그렇고, 눈치도 보이고, 이레 저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장마가 시작되자, 식수 문제보다 더 심각한 일이 닥쳤다.
비가 내리면 아궁이 입구까지 물이 차올라 퍼내야 했고, 연탄을 피울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방바닥으로 습기가 적잖케 올라왔다.
저녁에 두꺼운 요를 깔고 누워도 아침이면 요와 이불이 막 탈수한 세탁물 같았다.
맑은 날엔 햇볕에 내다 말릴 수있었지만,
비내림이 며칠씩 이어지면 눅눅한 이불을 다시 펴야 했다.
장마가 깊어지고, 점차 밤이 두려워졌다.
그 습한 이브자리를 온 몸이 거부했다
잠자리에 드는 일이 죽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취침은 더이상 편안한 쉼이 되어주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눕힐 따뜻한 아랫목의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침마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앉으면
구석구석 세포가 무너져 내린 듯한 기분 안좋은 습한 기운이 온몸 가득 했다.
몸속의 알갱이가 다 빠지고 바람구멍이 난 것처럼 구석 구석 휑한 한기가 돌았다.
눈을 감고 무기력한 몸을 추스르며 한참을 앉아 있어야만
서서히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날이 갈 수록, 짙어지는 신체의 이상 신호를 체감할 수 있었다.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던 장마가 끝날 무렵,
나약한 저는 다리는 걷는 자체를 거부하는 듯 흔들렸고, 몸을 서서 지탱하는 것조차 너무 힘겨웠다.
일상적 움직임조차 버거운 피로 속에서,
몸은 마치 물에 젖은 솜 같았다.
의욕도, 기력도 제 기능을 잃은 듯
그저 자리에 누워있고만 싶어졌다.
세탁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렇게 누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모유는 이미 말라 정상적인 수유는 불가능했다.
몸은, 갈 수록 내 의지대로 움직이기를 버거워하고 있었지만, 두려움도 걱정도 그저 인식일 뿐 처해진 환경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기다리림에 지칠 즘이면 내려 왔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는, 거울도 안 보는 여자가 되어 있는 나에게,
“왜 그렇게 말랐냐?” 고.. 의아해 했지만, 그리 큰 의미는 두지 않는것 같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그리고
“같이 있어 달라”거나 “같이 데려가 달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마음으로는 수없이 외치고 싶은 말이었지만,
입안에서 밷어내지 못하고 스스로 삼키곤 했다.
다만
그의 뜻과 태도의 경계 안에 머무는 일이 내가 취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닿지 못함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존재의 의미인 그를 사랑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떠나가면,
그를 향한 애틋함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다시 대책 없는 그리움으로 마음을 채웠다.
함께하고픈 의지 하나로 버티며 또다시 일어나 하루를 견뎌냈다.
한편,
사랑스런 두 아이 또한 나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또 다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지치고 쓰러질것만 같은 순간에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내 안의 희망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생활 환경은 늘 버거웠지만,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매일 엄마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그렇게 두 아이는 내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힘이자 끝내 포기하지 않게 하는 사랑의 증거였다.
그러한 생활속 나름의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는 옥상은 외로움을 삯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그곳은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득한 푸른 하늘 너머, 그가 있을 서울을 그리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곤 했다.
“아버지 하나님, 이곳은 너무 외로워요.
그와, 부모 형제가 있는 서울로 가서 살게 해 주세요.”
짧은 기도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발효되지 못한,
부모는 생각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었다.
날이 갈 수록 몸은 점점 더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의지로 견디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서울에 있는 여동생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안부를 묻는 글귀 끝에,
“언니, 이 돈으로 고기 사 먹어.” 라는 짧은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지 속에 곱게 접혀 있던 오천 원짜리 지폐는
모처럼 손에 쥔 돈이라 그런지, 유난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등 1학년이 무슨 돈이 있다고…”
뭉쿨한 여운이 마음 한가운데 오래 머물렀다.
지난날의 기억속으로 어느사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어 먹을 반찬 하나 없는 식탁이었지만, 차마 그 돈을 쓸 수가 없어 책갈피 속에 소중히 넣어 두었다.
신체 건강 리듬이 깨짐으로 인해 생리가 멈췄다는 것도 몰랐다.
남편이 다녀간 뒤 생리가 끊긴 것으로 생각했다.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오셨다.
보건소를 방문해서 가족계획에 대해 문의하고,
가능하다면 참여할 생각으로 버스를 탔다.
초행길이였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업무가 막 끝난 뒤였다.
심신의 피로가 복잡하게 뒤얽힌 상태를 겨우 추스르며, 발길을 돌리는데, 갑자기 심한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빈속 때문인가 싶었다.
체중이 천근 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들숨 날숨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똑바로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보행 하나가 왜 이토록 힘겨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줄을 놓는 다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니, 이성의 끈만 놓인다면 차라리 그대로 눕고 싶었다.
'…이성만 없었다면, 차라리 이성이 없다면…,'
귀가하는 내내 이 말을 얼마나 되뇌였는지 모른다.
힘겹게 버텨지는 몸을 억지로 이끌며,
비틀거리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뎠다.
부엌에는 물린 술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와 오랜만에 한잔하신 모양이었다.
상 위에는 막걸리가 한 잔 채 안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지쳤고, 허기지고 목도 말랐다.
술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만큼은 망설임이 필요치 않았다.
단숨에 들이켰다.
술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시어머니가 기억하신다 해도, 그순간엔 이미 상관없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그대로 쓰러졌다.
의식이 희미해지려는데, 부엌에서 상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 짜내듯 말했다.
“저… 어머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요.
잠시 누워 있을게요.”
그건, 며느리로서 다녀왔다는 보고이자,
저녁시간에 누워 있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작은 부탁이었다.
“맘대로 해라!.”
뭔가 못마땅하신 듯 했다.
뜻밖의 차갑고 냉정한 말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정신까지 지쳐 있어서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는데..,
시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내 안의 아픔을 들추듯 가슴 깊숙이 부딪쳤다.
하루 내내 애써 견뎌냈던 힘겨움이
그 말의 끝에서 꾸역꾸역 되살아났다.
꾹꾹 눌러 참아왔던 심정이 서운함과 서러움으로 북받쳐 오르자, 닭똥 같은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탕자 처럼, 부모 형제의 곁이 더욱 간절했고,
스스로의 처지가 새삼 견딜 수 없이 초라하고 비참하기 까지 했다.
밤이 깊도록 이불 속에서 소리 죽여 울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곳에 더 머문다면… 나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그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그날 따라 유난히도 저하 되었던 체력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절실히 느끼는 체감이었고
나의 버틸힘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직감하는 깊은 통증이었다.
결단해야 했다.
아이들을 시어머니께 맡기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상을 차려드리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제는 늦게 가서 보건소 업무가 끝나서 그냥 왔어요.
오늘은 일찍 다녀올게요.”
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방문 앞에서는 아들이, 떠나는 엄마임을 아는것 마냥 펄쩍 펄쩍 뛰며 울고 있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서둘러 부엌문을 나섰다.
엄마가 나오기를 기다린 듯, 벽에 기대 서 있던 딸아이가 젖은 내 눈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갔다와.”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마치 꼭 다시 오라는 다짐처럼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쫒기 듯 대문을 나섰다.
뒤로는 아들의 울음소리가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 울음이 멀어질수록, 내 안의 단단한 결단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전날,
점심도, 저녁도 먹지 못했었다.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무슨 힘으로 뛰쳐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먼 길 가려면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동네 입구 구멍가게 앞에서 찬 우유와 빵 한 조각을 목메이게 삼켰다.
그러고는,
못내 아이들이 있는 집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금세 시야가 흐려졌다.
참으려 억눌렀던 눈물이, 그제야 쏟아졌다.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밟혔다.
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릴 어린 마음들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가슴이 저리고 먹먹했다.
그렇게,
동생이 보내준 오천원은 서울행 버스표로 바뀌었다.
무겁기만한 몸을 부축여 의자에 맡기자,
순간 의식이 아득히 멀어졌다.
차창에 머리가 부딪칠 때마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모정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애써 삼키려는 의지마저 덜컹거리는 시간 속에 묻혀져 가고, 죽음보다 깊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으며,
"...이사하지 말아라!"
하셨던
그 윗집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언제나 '철없는 어린 딸' 앞에 있었다.
그리고
늘 감싸 안으시는 그 크신 사랑은,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천대까지의 복이었음을, 훗날 깨닫게 되었다.
고집스레 내가 선택한 길위에서,
삶의 또 다른 페이지는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고,
그 시간속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