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앞에서 멈춰 선 초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남기신 흔적에 대하여.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4)
이 말씀은 처벌의 언어라기보다,
내 상태를 그대로 들어내는 진단처럼 다가왔다.
그 앞에서
어리고 연약했던 믿음은
스스로를 가늠하다가 번번이 걸음을 멈추곤 했다.
연합 부흥회의 마지막 날,
금요 철야 예배의 합심기도 시간.
장내는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했고,
나 역시 목청껏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은사를 주세요.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수술해 주세요.”
그것은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결단이라기보다,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고백에 가까왔다.
아직 숙성되지 못한 믿음의 자리에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늘 한 발쯤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상처로 굳어진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반복되는 두려움과 실망이 나를 멈춰 세웠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라"
그 말씀이 마음에 닿을 때마다
나는 갈증 앞에 서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내 삶의 의미였던 사람이었다.
첫사랑이었으며,
보고있어도 여전히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부정과 정죄의 통증을 안은 채
그를 바라보는 나는
그 말씀 앞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초신자였던 나는
어떤 경우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
이미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무게를
내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해진 한 가지는,
사랑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감정으로도,
또 내 사고로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그를
무조건 사랑하는 일은
내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내가 바뀌기를 원했다.
그 절실함은, 천사와 씨름 하던 야곱처럼으로
눈물로 눈물로 하나님은 허락하심을 간청했다.
사랑의 근원이 '내 안'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옮겨지기를,
그렇게 오직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구했다.
마지막 설교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가슴 한가운데서
알 수 없는 감각이 일어났다.
굳이 표현 한다면,해산을 앞둔 배가
안쪽에서 부터 틀어지는 것처럼.
그 감각은
사르륵,사르륵 하는 리듬감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며 몇 분의 간격을 두고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미약한 통증이 따라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꿀처럼 스며드는 말씀에 취해
아무 일 없는 듯
가슴을 문지르며 예배를 마쳤다.
며칠 뒤,
브이넥 티셔츠를 입은 내게
주인 집사님이 물었다.
“( )엄마, 가슴에 왜 멍이 들었어요?”
의아한 마음으로 거울을 보니
가슴 한가운데,
동그랗게 번진 멍이 남아 있었다.
철야 예배 그날 밤,
통증이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하니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음을 증명해 보이신것만 같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며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에스겔 36:26)
퍼렇게 번진 멍 위로
그 밤의 통증이 겹쳐졌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개입하심이라 믿었다.
사랑의 방향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다시 설정하시는 손길.
인간은 스스로 바뀔 수 없음을
이미 아시는 분의 주권적인 선언이
그 자리에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뀐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팠고,
여전히 쉽지 않았다.
다만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의 방향만은 분명해졌다.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그의 언행이 아니라
그 영혼의 이면을 보게 되었고,
그 역시
상처 입은 희생자이며
자유를 빼앗긴 포로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주의 가슴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게 되었고,
그의 영혼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