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은영 Nov 14. 2022

시간의 용



#7.


잠시 후, 그늘은 고요해졌다. 남은 건 은비와 민지뿐 이었다. 물론 2급 서기관 설아도 한쪽에 조용히 서있었다.  

“우 태랑군. 본인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있나?”

하르방족 재판관이 조용히 물었다. 마치 옆집 아줌마처럼 온화하면서 따뜻한 목소리였다. 

흙으로 빚은 다문 입술이 벌어지자 역시 흙으로 된 이빨과 혀가 얼핏 보였다. 재판관은 눈도 깜빡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눈꺼풀에 달린 꽃이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그게 그러니까.....”

태랑은 우물쭈물대며 재판관을 올려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숨을 고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결심을 했는지 태랑이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숨 가쁘게 뛰어오며 외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놀랍게도 등장한 건 준서였다. 그런데 입고 있는 옷차람이 전혀 달랐다. 공방에서 보던 헐렁한 바지저고리가 아니라 갓을 쓰고 연푸른 두루마기에 파란색 한복 바지 그리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채로 뛰다시피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 사극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우와. 멋지다.”

은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태랑이 슬쩍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은비가 입만 벙긋거려 묻자 태랑은 입을 삐죽이며 다시 하르방을 바라봤다. 그 사이 태랑이 앞까지 달려온 준서는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헥헥대더니 겨우 진정된 듯 바로 섰다. 

“우 태랑은 도제 학교 교칙에 따라 처벌되어야 합니다!”

준서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서기단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이런 거였어? 학교 측 변호사?”

설아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중얼거렸다. 준서는 부드럽게 웃었다. 

“난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교 대표로 온 거야. 서기관이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와 학생을 납치해가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 납치라니?”

설아가 코웃음을 쳤다. 

“서기단에 부탁한 건 도깨비 눈꺼풀에 대한 것 뿐 처벌에 대해서는 일임한 적이 없거든. 그런데 학교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학생을 데리고 가다니 이건 월권이야.”

준서가 말했다. 

“이 꼬맹이는 도깨비 공주를 납치했거든. 당연히 그건 중죄라고. 재판소에서 처벌받아야 할 일이란 말이고.”

설아가 말했다. 

“서기관이 달려드는 데 겁먹지 않을 재주꾼이 어디 있을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준서가 대답했다. 설아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답할 말이 없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준서는 재판관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재판관님. 이 재판을 중지해 주실 수 없습니까?”

하지만 하르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태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늘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준서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 기다렸다. 설아 또한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하루방족 재판관이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보다 큰 힘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면 난 깨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도무지 보이질 않는 군요. 보이는 건 시계 뿐 이예요. 거꾸로 가는 시계. 우 태랑군, 이 일에 대해 설명할 의향이 없나요?”

“내일이요. 딱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태랑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비는 시계란 말에 가슴이 철렁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체 그 시계가 뭐기에 그러지? 왜 자꾸 튀어나오는 거냐고!’

“우 태랑군. 성스러운 흙은 이렇게 속삭이는 군요. 내일이면 너무 늦는다고.”

하르방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늦지 않습니다. 내일이 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거예요.”

태량이 고집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성스러운 흙은 절대 잘못보지 않아요. 그러니 우 태랑군이 설명할 의향이 없다면 저로선 그 힘을 걷어내는 게 최선이겠군요. 그런 뒤 학교 교칙에 따라 처벌받도록 두겠어요. 자, 우 태랑군. 앞으로 나오세요.”

태랑은 움찔 놀란 얼굴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척 하더니 갑자기 공중제비를 넘어 아까마냥 달아나려 했다. 

설어가 몸을 날려 태랑을 잡으러 들었다. 태랑은 폴짝폴짝 잘도 피했다. 하지만 그대로 몸을 날리는 순간 하르방족의 거대한 손이 태랑을 낚아챘다. 

윽!

태랑이 아픈지 얼굴을 구겼다. 하르방은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더니 말했다. 

“나쁜 버릇이군요. 태랑군. 고치도록 해요.”

“재판관님. 한 번만 봐주세요.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난 다고요!”

태랑이 애원했지만 하르방은 커다란 입술을 움직여 후, 바람을 내뿜었다. 

그 순간 은비는 멀미를 느꼈다. 땅이 일렁거리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은비야!”

민지가 쓰러지는 은비를 부축했다. 그 덕분에 엉덩방아를 찧는 것은 면했다. 하지만 서있을 수가 없었다. 민지가 뭐라뭐라 묻는 것 같은데 마치 물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콰쾅!

별안간 벼락이 쳤다. 은비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느틈에 은비는 민지의 품에 안겨 주저 앉아 있었다. 

갑자기 불어온 세찬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가고 하늘이 드러났다. 은비는 하르방이 고개 들어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왜 저러지?’

은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혔다가 숨을 삼켰다. 새까만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어찌나 새까만지 소름이 다 돋았다.  

“그렇군. 네 놈이구나.”

하르방이 거대한 입을 벌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꽃이 쏟아져나와 바람결에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런채로 태랑을 잡은 손을 땅에 붙이더니 다른 팔을 들어 구름을 헤집었다. 

황당하게도 구름이 돌처럼 딱딱한지 재판관의 손가락이 부서지며 흙이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재판관은 더욱 힘을 주어 구름을 자르려 들었고, 마침내 쩍, 소리를 내며 반토막이 났다.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로 황금 용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퉁방울 눈에 머리에는 사슴뿔이 달렸고 꿈틀대는 메기 수염이 달린 돼지 코에 소 귀 그리고 뱀처럼 황금 비늘이 박힌 쭉 빠진 몸까지 동화에서 흔히 보던 바로 그 용이었다. 

하르방 만큼이나 거대한 황금용은 황금색 불을 뿜고 있었는데 구름이 갈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쭉, 잡아뺐다. 

은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살짝 벌어진 용의 입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터져나오는 불길은 어찌나 뜨거운지 상당히 거리가 먼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이러고 가만 있어도 되나?’

걱정도 잠시, 구름 아래쪽에 투명한 막이 용의 하강을 막았다. 황금 용은 부리부리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막을 뚫으려 했지만 쭉, 늘어날 뿐 어림도 없었다. 결국 황금 용은 포기한 듯 빼민 목을 꼿꼿이 세우더니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의 사슬로 묶인 우 태랑은 나의 계약자. 그대가 정녕 나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러더니 커다란 퉁방울 눈을 데구르르 굴려 은비를 내려다 봤다. 

'오호라! 네가 아홉 번째 소녀로구나.'

은비의 머릿 속에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은비는 기함했다. 

'지금 내 머릿 속에 말하는 건가?'

'그래. 소녀야. 넌 내 기대보다 훨씬 평범하구나.'

황금 용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비는 기가 막혀 뭐라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한 발 앞서 하르방이 있는 힘껏 바람을 내뿜었다.  

후욱-.

마치 지우개를 쓴 것처럼 황금 용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더니 이윽고 까만 구름이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드러났다. 

“젠장. 우 태랑!”

설아의 비명같은 고함이 터졌다. 그제야 은비는 태랑이 온데간데 사라진 걸 알았다. 다들 넋을 놓고 황금용을 보는 사이 줄행랑을 친 모양이었다. 

“녀석. 일을 크게 만드네.”

준서가 당황해 주변을 살피며 쩔쩔맸다. 은비는 그 둘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태랑이 무슨 짓을 한거지?’

그때였다. 풀썩, 옆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나래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민지야!”

은비는 그제야 민지가 기절해 쓰러진 것을 알았다. 아까 휭 하니 가버리더니만 언제 되돌아 온 건지 나래가 받아든 덕분에 다치진 않았지만, 민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 민지야. 류 민지!”

나래가 민지를 흔들며 소리쳤다. 준서가 당황한 얼굴로 뛰어왔다. 

“안되겠다. 근처 쉴 만한 곳으로 옮기자.”

은비는 나래와 함께 힘을 합쳐 민지를 준서의 등에 업혔다. 그런 뒤 다같이 상가 거리로 달려갔다. 

가장 초입에 입는 차를 파는 상점으로 뛰어 들었다. 점원 아줌마는 기절한 민지를 보고는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가게 뒷방으로 안내를 했다. 점원들이 들어와서 쉬는 곳인 듯 했다. 

어른 한 명이 넉넉히 누울 수 있을 만큼 크고 기다란 의자가 몇 개나 놓여있고, 한쪽에는 차와 과자까지 놓여 있었다. 덕분에 민지를 편안하게 뉘일 수 있었다. 

“머리에 이것을 좀 대주렴.”

점원 아줌마가 차갑게 적신 물수건을 건넸다. 그걸 받아든 나래는 얼른 민지의 머리에 물수건을 올렸다. 물 한 방울이 길게 흘러내리며 볼에 선을 그었다. 놀랍게도 물이 그린 선을 따라 오색이 반짝였다. 얼핏 비늘무늬도 떠올랐다. 

“신기하다.”

은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물을 만져봤다. 손가락에 놓고 봤지만 그냥 물이었다. 오색 빛도 비늘무늬도 은비의 손가락에선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 민지는 용족이라고. 그래서 저런 거야.”

나래가 소곤거렸다. 은비는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을 옷소매에 문질러 닦았다. 조금 떨어져 서있던 준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난 가봐야겠다. 혹시라도 태랑이 보면 우리 공방에 숨겨라. 설아 눈에 띄었다간 얼음감옥에 한 달은 갇혀 있어야 할 거야. 그나마 공방에선 그런 짓은 못할 테니까. 알겠지?”

은비와 나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서는 씩 웃고는 바쁘게 방을 나섰다. 

민지가 깨어난 건 십여분 뒤였다. 아주 힘들게 눈을 뜨며 긴 숨을 내쉬었다. 

“민지야! 괜찮아?”

나래가 반가워 소리쳤다. 하지만 민지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은비는 걱정스런 얼굴로 살피다가 문득 시계가 떠올랐다. 

‘그 소동에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은비는 얼른 민지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다행히 시계가 잡혔다. 

그걸 꺼내드는 데 갑자기 은비의 눈꺼풀 안쪽에 번쩍 번쩍 빛이 스쳐지나갔다. 아침에 작업실에서 그랬던 것과 똑같았다. 

“왜 그래?”

나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은비는 어색하게 미소 짓고는 시계를 오른손에 올리고는 왼손으로 살며시 어루만졌다. 

마치 환상처럼 눈앞에 황금 용이 떠올랐다. 톱니바퀴와 갖가지 공구가 놓인 책상에 앉아 황금 용은 바로 이 시계를 만들고 있었다. 은비가 왼손을 떼자 환상은 바람에 날리는 안개처럼 흩어져버렸다.  

“이 시계, 황금 용이 만든 거구나.”

은비가 중얼거렸다.

“긴가민가했었어. 태랑이 정말 그 가게에 갔을까 궁금했지. 은비가 학교를 그만뒀는데도 태랑이 여전히 쾌활하고 활기찬 걸 보면서 이상하단 생각을 했어. 하지만…….”

민지가 말하다 말고 코를 훌쩍거렸다. 눈가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넘칠 듯 차올랐다. 민지는 이마에 얹힌 수건을 손에 쥐며 일어나 앉았다. 

“겁쟁이라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어. 널 다시 본 그 날 뭔가 잘못됐구나 싶었어. 그런데도 모른 척 하려 애썼어. 도깨비 눈꺼풀 탓이라고 생각하려 했어. 난 바보야. 겁쟁이야. 못된 아이야.”

“가게라니? 대체 이 시계가 뭐에 쓰이는 건데?”

은비가 물었다.

“정확히는 나도 몰라. 내가 아는 건 그 시계가 그림자 거리의 장난감 가게에서 산 거라는 거야. 그곳에 가는 길을 태랑에게 알려준 게 바로 나라고!”  

민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으흑, 어어엉-.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나래가 따라서 눈시울을 붉히며 민지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거렸다. 

“나참 그 놈의 여우가 무서운 게 없나 보네. 그림자 거리라니…….”

은비는 깜짝 놀랐다.  

“너 거기 가본 적 있니?”

“가보긴! 말이 좋아 장난감이지.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죄다 큰일 날 물건들을 파는 곳이야.”

나래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태랑은 어떻게 간건데?”

은비가 눈이 동그래져 묻자 나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도 모르지. 거긴 오직 시간의 용에게 허가증을 받은 자만이 갈 수 있어. 만약 서기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태랑은 퇴학당할 거야.”

엉엉 울던 민지가 급기야 딸꾹질을 해댔다. 나래가 등을 쓰며 달래려 들었다. 

“그만 울어. 네 잘못 아냐. 보나마나 그 여우 녀석이 널 살살 꼬드겨 길을 캐물었겠지.”

“알면서도 가르쳐줬는걸. 왜 그러는지 궁금해서 그래버렸어. 내 못말릴 호기심 때문에 알려줘버렸다고!”

민지가 딸꾹거리며 말했다. 은비는 답답한 마음에 시계 뚜껑을 열어보았다. 시간은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늘은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멎어 있었다. 그게 너무 불길했다. 아홉 번째 소녀 어쩌고 하던 걸 봐선 은비와 이 일은 무관하지 않았다.  

“그 가게에 가볼까?”

은비가 물었다. 

“고 은비. 내 말 못 들었어? 거긴 금지구역이라고!”

나래가 놀라 말했다. 

“학교든 서기단이든 이 시계를 보게 되면 태랑은 퇴학이잖아. 그러니 그곳에 가서 돌려주고 오는 거야. 반품을 하는 거지. 어때?”

은비가 말했다. 나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민지는 소맷부리로 눈물을 쓱, 닦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안내할게.”

이전 06화 두 명의 나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