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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은영 Nov 14. 2022

두 명의 나래



#6.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을 나섰다. 은비도 공방을 나와 시장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짓궂다 해도 태랑이 못된 짓을 할 것 같진 않았다. 물론 어제는 은비를 내버려 두고 휙 가버리긴 했지만 그것도 고의는 아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돌아와서 태랑을 봤던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은비는 발걸음을 멈췄다. 

본 것 같기도 하고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했다. 아니 그전에 왜 그 기억이 이렇게 흐릿한지가 더 의뭉스러웠다. 고작 어제 일인데 이상할 정도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설마 도깨비 눈꺼풀이 아직도 붙어 있는 건 아니겠지?’

은비는 걱정이 돼 눈을 비비적거렸다.  

“고 은비. 주머니에 든 게 뭐야?”

나래가 앞을 성큼 막아섰다. 은비는 손을 거두며 나래를 바라봤다. 옆에는 민지도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은비의 저고리에 달린 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은비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뒤로 물러섰다.

“왜?”

은비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는 뒤로 성큼 물러섰다. 

“왜긴 왜야. 민지가 자꾸 그게 마음에 걸린다고 그러잖아.”

나래가 툴툴댔다. 은비는 눈을 끔뻑거리며 민지를 바라봤다. 민지는 물어뜯은 손톱을 퉤, 바닥에 뱉더니 조용히 물었다.

“아까 태랑이 네 주머니에 뭔가 집어넣는 걸 봤어. 난 태랑이 그걸 서기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도망쳤다고 생각해.”

은지는 망설이다가 살며시 시계를 꺼내 보였다. 

“이거 말이야?”

민지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은지가 그 위에 올려놓자 민지는 은시계를 굽어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비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아기 도깨비가 될 거라던 컵도 이 시계를 보여주더라. 그러면서 그랬어. 왜 이 시계는 시간이 자꾸 줄어드냐고.”

“그렇다면 역시 이 시계는…….”

민지가 시계를 꽉 움켜쥐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머리 위가 시끄러워졌다. 은비도 민지도 그리고 나래도 깜짝 놀라 올려다봤다. 

태랑이 지붕을 날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철썩, 철썩!

누군가가 조종이라도 하는 듯 눈보라는 채찍 모양으로 뒤로 휘어졌다가 앞으로 내리쳤다가 연신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태랑은 아슬아슬하게 눈 채찍을 피해 몸을 날렸다.

“안 잡히지롱!” 

이윽고 눈 채찍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태랑은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살짝 굽히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 들어올 찰나다. 은비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 뭘 어쩌려고 저러지?’

그 순간 회오리치던 눈 채찍에서 눈사람이 퐁퐁 튀어나왔다. 마치 팝콘 기계에서 팝콘이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물론 팝콘처럼 작지는 않았다. 죄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였다. 

“너무 귀엽다.”

은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마자 눈 사람들이 들은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헉!

입 안에 날카로운 고드름이 꽉 차 있었다. 그저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날 것처럼 날카롭다 보니 소름이 쫙 돋았다. 

“여우 살려!”

태랑이 후다닥, 땅으로 뛰어내렸다. 

“미안하다!”

외침과 동시에 멍하니 서있던 나래를 끌어안았다. 

“이 여우 놈아! 떨어져!”

나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닸다. 태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래를 끌어안은 채 앞을 바라봤다. 

눈사람들이 함박눈처럼 골목으로 쏟아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땅에 내려선 건 아까 봤던 설아였다. 

“진짜로 놀아볼까 했더니 이러기야?”

“하루! 딱 하루만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요?”    

태랑이 애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 사이 나래가 발버둥 쳤지만, 황당하게도 태랑의 팔 힘에 옴짝달싹 못했다.

은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 얼핏 은비는 민지가 태랑의 시계를 숨기는 것을 보았다. 설아가 뭔가 낌새를 느낀 건지 고개 돌려 민지를 바라봤다. 

‘안돼!’

은비는 정신이 번쩍 나서 민지를 끌어안으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여우 너무 무서워!”

민지가 은비가 왜 그러는지 알아차린 듯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 그래 봤자 여우인걸.”

둘을 쏘아보던 설아가 시선을 돌리자 민지가 태랑을 향해 외쳤다.  

“당장 나래 풀어 줘. 뭘 어쩌겠다는 건데!”

“음, 역시 난 여우니까 이런 게 좋겠지?”

태랑은 장난치듯 답하더니 나래를 끌어안고 그대로 공중제비를 했다. 

“안돼!”

설아가 손을 뻗었고 눈사람들이 바람처럼 달려들었지만 한 발 늦었다. 

땅에 내려선 건 우습게도 두 명의 나래였다. 

“웃기고 있네. 우 태랑. 내 흉내를 낸다고 사람들이 속겠냐?”

1번 나래가 말했다.

“뭐야! 야. 네가 우 태랑이잖아. 감히 내 흉내를 내!”

2번 나래가 말했다. 

“둔갑술까지 쓰고 여우는 이래서 피곤하다니까.”

설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사람들에게 눈짓했다. 

조그맣게 흩어져 있던 눈사람들이 한 곳으로 뭉치더니 거대한 눈사람이 되어 섰다. 눈사람들은 쿵쿵대며 두 명의 나래에게 다가서더니 사이좋게 옆구리에 나래를 하나씩 안아 들었다. 

“놔! 이거 놓으라고!”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둘 다 마구 발버둥 치며 풀려나려고 애를 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눈사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은비와 민지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설아가 눈사람의 뒤를 따르며 흘끔 민지를 눈짓했다. 아무래도 뭔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반면 민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태평하게 서있었다. 결국 설아는 시선을 돌렸다. 

은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설아가 쏘아본 게 은비였다면 너무 무서워서 큰 소리로 외쳤을 거다. 

‘이상한 시계를 민지에게 줬어요!’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설아는 두 명의 나래를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은비가 중얼거리자 민지가 옆에 서며 말했다.  

“재판관에게 데리고 가겠지. 서기단은 공식적으로는 하르방족의 지휘 아래 있으니까.”

“하르방족?”

“성스러운 흙으로 빚은 부족이야. 재주꾼의 시장에서는 하르방족만이 재판권을 가져. 그래야 다른 부족도 군말이 없거든.”

“태랑이 큰 벌 받을까?”

“가볼래?”

“어딜?”

“재판소. 어쩌면 우리가 도움이 될 지도 몰라.”

은비는 망설였다. 만약 갔다가 태랑이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런 거란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쩌지 고민이 됐다. 하지만 왠지는 몰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것만 같았다. 

태랑은 아주 착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은비를 챙겨주려 애썼다. 고작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도 그 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좋아. 가자.”




은비는 민지를 따라 재판소로 향했다. 큰길을 몇 개나 건너고, 다리도 몇 개나 건넌 뒤에야 도착한 곳은 우습게도 흙담 앞이었다. 

공방 2층 교실 창밖으로 볼 때도 참 높다 싶었는데 서서 올려다보니 으리으리했다. 직선으로 가파르게 쭉 뻗은 담에 핀 꽃과 풀들이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 

“재판소에 간다더니?”

은비가 물었다.

“언덕을 찾아야 해. 재판관이 있는 곳이 곧 재판소거든.”

민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까치발로 서서 주변을 살폈다. 

끝자락에 위치한 상점가와 담 사이는 100m는 떨어져 있어 그냥 풀밭이 길처럼 쭉 뻗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꽃도 없고 나무도 없는 걸 보니 누군가가 세심하게 길을 돌보는 모양이었다.

“아, 찾았다.”

민지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은비는 민지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줄줄 똑같은 높이로 이어지던 담이 불쑥 튀어 올라있는 게 보였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탓에 진짜 언덕처럼 보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비는 민지와 언덕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마치 나팔꽃을 뒤집어 놓은 모양을 한 거대한 우산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담장 앞 그늘에는 대나무로 짠 커다란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돗자리 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덩치가 제법 있어 다닥다닥 서로 붙어 앉아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돗자리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땀만 주룩주룩 흘리는 중이었다. 

“우린 그냥 이쪽에 서 있을까?”

민지는 돗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은비는 민지 곁에 앉아 우산을 눈짓했다. 

“설마 저 사람들 태랑이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겠지?”

“그럴걸. 도깨비들은 연락을 주고받는 게 아주 빠르거든. 공주 일이니 더더욱 그랬겠지.”

민지가 옆을 흘끔 보더니 덧붙였다.  

“이곳 동쪽 시장에서 일하는 도깨비 재주꾼들은 다 온 것 같네.”

“진짜? 어쩜 좋아.”

은비는 두 손을 모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렇게 많은 도깨비들이 다 같이 입을 모아 태랑에게 심한 벌을 주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이 됐다. 게다가 나래는 태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괜찮을 거야. 나래는 태랑을 진짜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민지가 은비의 속내를 읽은 듯 소곤거렸다. 

그때였다. 그늘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리저리 신나게 수다를 떨던 도깨비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은비는 꼭 모은 손에 힘을 주며 도깨비들의 시선이 쏠린 곳을 바라봤다. 

저만치 설아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등 뒤로는 눈 사람 대신 거대한 눈 뭉치가 굴러오고 있었다. 설아가 멈춰 서자 눈 뭉치도 구르던 것을 멈췄다.

탁!

설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눈 뭉치가 안개처럼 옅어지더니 이내 나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래를 본 그늘 안의 도깨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세차게 내뿜는 숨인지 우산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이내 도깨비들이 앗! 소리 내며 눈을 찡그렸다. 

나래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나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아는 그런 도깨비들의 반응에 눈도 깜빡하지 않고 두 명의 나래에게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판관 님 앞에 가서 서도록."

돗자리 위의 도깨비들은 벌떡 일어나 좌우로 갈라서더니 두 명의 나래에게 팔을 가슴에 대며 예를 표했다. 

앞서 걷는 나래는 지친 표정이었다. 뒤를 따르는 나래도 못지않게 지쳐 보였다. 

둘은 도깨비들 사이를 걸어 돗자리 맨 앞에 가서 섰다. 설아는 뒤를 따르기가 뭐했던지 그늘을 뱅 돌아 두 명의 나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섰다. 

‘재판관은 어디 있는 거지?’

은비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선 곳은 문도 없는 밋밋한 담 앞이었다. 은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민지에게 물었다. 

“저기 여기 맞아?”

민지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굉음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 돌린 은비는 입을 떡 벌렸다. 

눈앞에 있는 담이 저 혼자 마구 흔들거렸다. 조금 높은 둔덕처럼 보이던 것이 쑥, 솟아올랐다. 

담에 박혀 있던 꽃과 풀들이 뽑혀 나와 이리저리 휘날리며 허공에서 춤을 췄다. 

신기하게도 먼지는 조금도 일지 않았다. 담이 저토록 미친 듯이 움직이는데도 먼지는커녕 은비가 밟고 선 땅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윽고 꽃비가 가라앉고 나자 얼굴이 보였다. 이제 보니 담인 줄 알았던 게 둥근 뒤통수였고 굉음은 고개를 빳빳이 들며 내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땅에 얼굴을 박고 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햇살 아래 드러난 얼굴은 모두 흙으로 되어 있었지만 눈이 있었고 눈꺼풀이 있었고 코가 있고 콧구멍이 있었다. 꾹 다문 입술을 두툼했다. 

옆으로 길게 뻗은 담은 알고 보니 팔이었다. 고개를 들면서 팔에 힘이 들어간 건지 울퉁불퉁한 근육이 솟아올랐다. 둥글게 휘어지는 두 개의 팔 끝에는 손도 있었다. 

하도 커서 먼 거리에서도 다섯 개의 가닥이 제대로 보이니 모르긴 몰라도 저 앞에 서면 그냥 다섯 개로 갈라진 벽이 서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예전에 네가 그랬는데. 제주도란 섬에 있는 돌하르방이란 동상이랑 똑같다고. 나중에 내가 조사해봤는데 그거 하르방족을 위해 인간들이 만든 거래. 한때 하르방족이 제주도에 살았다더라.”

민지가 소곤거렸다. 은지는 눈을 굴렸다. 비로소 거대한 얼굴 위에 얹힌 흙으로 된 모자가 보였다. 제주도의 상징물인 돌하르방이 쓰고 있는 모자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흙인데도 안 무너지네.”

은비가 얼떨떨해하자 민지기 피식 웃었다. 

“성스러운 흙이니까.”

그러는 사이 하르방이 고개를 쭉 빼더니 두 명의 나래를 굽어 보았다. 

펑!

작은 연기와 함께 왼쪽의 나래가 태랑으로 변했다. 태랑은 어이없단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하르방님이시네.”

진짜 나래는 태랑을 쓰윽 한 번 보고는 돌아서서 도깨비들에게로 걸어갔다. 

“공주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주마마.”

도깨비들이 나래를 둘러싸며 한 마디씩 던졌다. 나래는 멋쩍은 얼굴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돗자리에서 내려왔다. 도깨비들은 볼 일 다 봤다는 듯이 나래의 뒤를 따랐다. 

나래가 걷다 말고 흘끔 민지와 은비를 바라봤다. 어째 눈치가 이쪽으로 오고 싶은 것 같았는데 도깨비들이 우르르 따라오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래는 인사 대신 손을 들어 보이더니 그 많은 도깨비들을 끌고 그늘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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