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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은영 Nov 14. 2022

고장 난 시계



#5.


“물어보는 걸 어떡해. 딱히 은비가 나래에게 해를 끼칠 것도 아니고.”

태랑이 입을 삐죽거리며 웅얼거렸다. 준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럼 여기 와서 그러지 말던가. 대체 왜 작업하는 데 방해냐고. 방해가.”

“은비가 공부하는 게 영 이상하다잖아. 왜 이런 걸 공부해야 하냐고 하기에…….”

“그래? 고 은비. 이리 와.”

준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앉아있던 의자로 걸어갔다. 은비가 멋쩍어하며 다가서자 준서가 제가 앉아있던 의자를 눈짓했다. 

“뭐해?”

은서가 냉큼 자리를 잡자 준서는 은서의 손에 낡은 컵을 쥐어줬다.

“컵이 마음을 열었으니까 한결 쉬울 거야. 눈을 감고 상처를 만져 봐.”

준서가 속삭였다. 은비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킨 대로 손을 들어 상처를 만졌다. 별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상처에 난 나뭇결이 좀 거칠다는 정도가 다였다. 

“좀 더 부드럽게. 갓난아기 볼을 쓰다듬는다고 생각해 봐.”

준서가 말했다. 은비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의심하며 손에 힘을 빼고 최대한 부드럽게 상처를 쓸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정체불명의 뭔가가 보였다 사라졌다. 동시에 오래된 나무 냄새가 느껴졌다. 

헉!

은비는 눈을 번쩍 떴다. 준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공부가 익숙해지면 지금 본 게 번개가 아니라 떨어지는 낙엽처럼 느릿느릿해지지. 컵을 고치는 데 꼭 필요한 걸 볼 수 있게 된 단거야. 어때? 다시 도전?”

“네. 해볼래요.”

은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상처를 어루만지자 번개가 또 번쩍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좀 달랐다. 

가물가물 사라져 가던 빛은 어느 순간 멈칫하나 싶더니만 점점 강렬해지고 점점 밝아졌다. 이내 동그란 원처럼 보이나 싶더니 갑자기 돋을새김으로 찬란한 황금 모양이 빛을 가르며 타올랐다. 

이윽고 은비는 알았다. 그건 시계였다. 어제 태랑이 꺼내 보던 주머니 시계. 

뚜껑은 열려 있었고 시곗바늘은 어제처럼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은비는 초침이 거꾸로 도는 것을 보았다. 

초침이 12를 지나자 우습게도 큰 바늘이 거꾸로 움직였다. 2시 15분. 그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만큼이나 아주 생생하면서 또렷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궁금해. 너무 궁금해. 왜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거야?”  

은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땀이 주르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잠깐 사이 온몸이 땀범벅이 됐다. 

“잘하는데. 자, 땀 닦아.”

준서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건을 건넸다. 은비는 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컵을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뭐야! 뭐야! 나도 아직 제대로 못 봤는데 치사하게 먼저 보다니.”

어느 틈에 등 뒤에 선 태랑이 툴툴댔다. 

“지난해 성적 보니까 은비 공부 잘했더라. 까먹었어도 실력이 어딜 가겠냐?”

준서가 말했다. 

“칫, 형. 못됐어.”

태랑이 입을 쭉 내밀고는 투덜댔다. 그러고 둘이 투닥거리니 뭐라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은비의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괜찮니?”

준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환청이…….” 

은비가 중얼거렸다. 

“인상 풀어.”

준서가 은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은비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준서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걱정 마. 네 머리가 이상해져서 그런 게 아니니까. 이 컵은 이제 곧 아기 도깨비가 될 거야. 그러니 벌써 제 목소리도 가지고 있고 제 몸을 제멋대로 움직여보기도 해. 그 바람에 이 녀석 이 꼴이 되어버린 거긴 하지만 아기 도깨비들은 다 그러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은비는 눈을 끔뻑이며 듣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시계를 보여줬는데. 오래된 시간이 어쩌고 하면서.”

“그게 무슨…….”   

준서가 묻는데 태랑이 고함치듯 외쳤다. 

“왜 난 안 들리는데? 이거 고장 난 게 분명해.”

어느새 컵을 손에 든 태랑이 툴툴댔다. 준서가 태랑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준서가 말했다.

“그러게. 귀여운 우리 태랑은 왜 안 들릴까? 요렇게 깜찍하고 사랑스러운데 말이지.”

“윽, 징그러. 그만해. 그런 말투.”

태랑이 팔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며 외쳤다. 준서는 그러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형은 가슴이 아파서 차마 태랑이 은비 실력을 따라잡으려면 밤새서 공부해야 한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내 맘 알지? 응? 응?”

태랑이 토하는 시늉을 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은비는 ‘풋’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은비에게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 마냥 귀여워해 주고 마냥 사랑해주던 사람. 

‘꼭 아빠 같아.’

그때였다. 태랑의 뱃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준서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자, 그럼 방문 기념으로 아침 식사라도 하러 갈까?”     




시장에 온갖 먹거리가 넘쳐나는 것처럼 공방 직원용 식당에도 온갖 음식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은비는 집에서 토스트 한 조각을 먹고 나왔다 보니 그냥 우유나 한 잔 마시려 했지만 군침도는 음식이 너무 많았다. 

“아침부터 떡볶이 먹어도 될까?”

아주 진지하게 고민을 하자, 태랑이 쟁반에 잡채밥을 퍼 담으며 푸 웃었다. 

“여긴 우리 같은 공방 학생들은 함부로 못 오는 곳이야.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 게다가 죄다 꿀맛이라고!”

결국 은비는 쟁반에 떡볶이와 어묵 그리고 엄마 눈치 보여서 만날 입맛만 다시던 쿨피스까지 챙겨서 식탁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흰 죽을 먹고 있던 준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부터 그렇게 먹고도 배 안 아프겠니?”

“그래도 먹을래요.”

은비는 그렇게 대답하며 일단 컵에든 쿨피스를 쭉 마시려 했다. 하지만 입에 물자마자 그대로 뿜는 줄 알았다. 

“윽. 써!”

“어쩐지. 호지차를 한 잔 가득 받아오기에 신기하다 싶었는데.”

준서가 웃음을 터트렸다. 은비는 듣는 둥 마는 둥 어묵 국물을 떠먹었다. 

다행히 생긴 대로 익숙한 맛이었다. 아니, 길가다 가끔 사 먹던 것보다 백 배는 맛있었다. 국물이 어찌나 맛있는지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떠먹었다. 꼬치에 꿰인 어묵을 먹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의 맛이었다. 

“이곳 어묵은 유명하지. 아주 좋은 생선으로 만드는 어묵 재주꾼이 있거든.”

준서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은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어묵을 부리나케 먹어 치웠다. 그러고 있는데 태랑이 음식을 산더미처럼 담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우 태랑. 소화제 사다 줄까?”

준서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형님. 절 뭐로 보고. 이 정도쯤이야.”

태랑은 씩 웃으며 쟁반을 식탁에 내려놓더니 팔을 걷어 부쳤다. 

잠시 후, 은비는 그 많던 음식이 태랑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어찌나 빠르게 먹어치우는지 기가 질릴 정도였다. 

“너 한 열흘 굶었냐?”

준서가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야유했지만 태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 먹어치운 뒤 후식을 먹겠다며 또 일어섰다. 

“내가 다 배가 부르네.”

준서는 빈 죽그릇을 밀어놓더니 은비를 보며 눈짓했다. 

“떡볶이 안 먹니?”

은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이번에는 떡볶이를 먹어 보았다. 

“맛있어!”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우물우물 씹는데 너무 맛있어서 막 웃고 싶어졌다. 

“행복해지는 떡볶이가 나왔나 보구나. 떡 만드는 재주꾼이 있는데 기분에 따라 맛이 변하거든. 오늘은 운이 좋았네.”

준서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은비는 순간 가슴이 콩콩 뛰어 떡볶이를 더욱 열심히 먹어댔다. 이러고 연상의 오빠와 마주 앉아 있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좀 어색했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태랑이 아까보다 훨씬 많은 음식이 쌓인 쟁반을 내려놓으며 눈을 굴렸다. 은비는 인상을 쓰곤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밥이나 먹어.”

태랑은 입을 삐죽이더니 옆에 앉으며 툴툴댔다.

“방금 너네 엄마랑 똑같았어."

순간 은비는 입 맛이 뚝 떨어졌다. 

"아니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태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어치웠다. 

"먹어. 은비야."

준서가 위로하듯 말했다. 은비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네." 

    



준서가 나눠준 투명한 플라스틱 받침 위로 각양각색의 문양이 떠올랐다. 

동그란 바퀴 모양으로 뱅글뱅글 돌며 문양이 놓여 있어 꼭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록으로 만든 것만 같다. 

‘예쁘다!’ 

은비가 감탄하는 사이 눈앞에 놓인 주사위가 영상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문양은 처음에는 하나로 시작해 계속 이어졌다. 그걸 보고 기억해 손에 들린 판에 있는 문양을 본 순서대로 눌러야만 했다. 

하나일 때는 쉽지만 점점 뒤로 갈 수 록 어려워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움직이던 손놀림이 점점 숨 가쁘게 왔다 갔다 거렸다. 

은비는 5개까지 맞춘 뒤 계속 틀리자 점점 짜증이 났다. 아침에 칭찬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잘할 줄만 알았는데. 게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직은 괜찮다는 듯 손을 놀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기억을 지워먹은 거냐고!’

은비는 왠지 억울한 기분에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슬슬 탈락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은비처럼 그 애들도 다른 애들을 흘끔 거리며 우울한 낯빛을 지었다. 그러다 20개에 이르자 반이 넘게 탈락했다. 다들 남은 애들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았다. 

급기야 30개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건 딱 두 사람 민지와 태랑이었다. 

구경하는 아이들이 슬슬 열을 내기 시작했다. 여자애들은 민지를, 남자애들은 태랑을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그래, 그거야!” 

그런 혼잣말도 가끔 튀어나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래가 참다 못해 벌떡 일어서더니 민지의 문양 받침대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태랑의 등 뒤로는 남자애들이 잔뜩 몰려 서서 어깨너머로 구경 중이었다. 

은비는 그런 둘의 집중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게 꼴지 반이면 일등을 하는 애들은 대체 어느 수준이지!'

아쉽게도 승부는 예상치 못했던 일로 끝이 났다. 

갑자기 준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입구에 나타났다. 소녀는 위아래로 까만 비단에 황금 문양이 수 놓인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치마는 풍성했지만 아주 짧아서 무릎 위에서 살랑거렸다. 꼭 한복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표정은 그런 옷차림과는 다르게 아주 매서웠다. 

“서기단이 여긴 왜?”

나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읊조렸다. 그러자마자 태랑과 민지를 제외하고 모두가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2급 서기관 나 설아다. 우 태랑이 누구지?”

그제야 태랑이 고개 들어 설아를 바라봤다. 민지도 손을 멈추며 설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세요?”

민지가 물었다. 설아가 민지를 바라보며 대답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태랑이 뒤로 한 바퀴 휙 공중제비를 하더니 창문턱에 올라섰다. 여우란 말이 맞는지 몸놀림이 아주 날랬다. 

“전 바빠서 이만 실례.”

태랑은 창을 열며 배시시 웃었다. 

“우 태랑. 서라!”

설아는 황급히 태랑을 잡으려고 몸을 날렸다. 그 바람에 책상이 두 조각으로 뚝 부러졌다. 

은비는 책상에서 황급히 몸을 뺐지만, 몇몇 아이는 그러지 못해 아픔으로 신음했다. 순간 설아가 멈칫거렸고 태랑은 그 틈을 타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젠장!”

설아가 창틀에 기대 밖을 내다보더니 혀를 찼다. 하지만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의사를 불러주지.”

설아는 차가운 얼굴로 아픔에 눈물짓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하더니 교실을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왜 태랑이…….”

은비는 어이없어하다 주머니가 묵직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살며시 집어넣어 만져보니 시계였다. 흘끔 눈만 아래로 해서 확인하니 태랑의 은시계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가슴이 콩콩거렸다.  

“기가 막히는 군. 서기관을 상대로 도망치다니.”

나래가 끌끌 혀를 찼다. 반면 민지는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도리질 쳤다. “뭔가 잘못됐어. 뭔가 확실히 잘못된 거야.” 

잠시 뒤, 방으로 하얀색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이 들이닥쳤다. 다친 아이들을 부축해 어른들은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은비를 비롯해 다치지 않은 아이들 몇 명은 남아 뒷정리를 했다. 겨우 다 치우고 나자 준서가 한숨 섞인 얼굴로 나타났다. 

“고생들 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야. 내일 보자꾸나.”

“저기 서기관이 왜 태랑을 잡으러 온 거죠?”

은비가 머뭇대며 물었다. 

“네 눈에서 발견된 도깨비 눈꺼풀을 산 게 태랑이었대. 눈꺼풀을 판 도깨비를 찾아냈다고 하더라고.”

준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소리친 건 은비가 아니라 민지였다. 은비는 너무 놀라 눈만 끔뻑댔다. 준서는 민지를 보고는 말했다. 

“그러게.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 녀석 왜 도망은 쳐가지고. 그래 봤자 시장은 서기단의 손바닥 안인데 말이야. 뭐, 잡히면 말하겠지.”

“저기 어쩌면…….”

은비가 운을 떼자 준서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은비는 시계에 대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태랑이 믿고 맡겼으니 자초지종을 들을 때까지는 비밀로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내일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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