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랑은 가게 밖으로 나와서도 별 말이 없었다. 그냥 잠자코 앞서 걸었다. 이따금씩 뒤를 흘끔 거리며 은비가 따라오나 눈짓하면서 말이다.
이윽고 큰길이 아니라 가게와 가게 사이에 난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몇 개나 되는 사잇길을 지나고 작은 길을 지나쳐 마침내 멈춰 선 곳은 발아래로 흐르는 강이 보이는 방죽이었다. 태랑은 손수레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가게에 다가가 말했다.
“아이스크림 둘이요.”
잠시 뒤, 은비는 손바닥에 들어올 듯 작은 호리병을 반으로 잘라 만든 그릇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들고 방죽에 앉았다.
동글동글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만들어진 아이스크림은 저마다 색이 달랐다.
"하나 씩 먹지 마. 한 번에 왕창 먹는 게 맛있어."
태랑의 조언대로 크게 떠서 한 입 먹어보니 처음 건 새콤한 맛, 두 번째 건 달콤한 맛, 세 번째는 치즈맛이 났다.
“끝내주지?”
은비처럼 아이스크림을 입에 퍼넣으며 태랑이 말했다. 은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근데 돈 안내?”
“도제 학교 학생은 공짜야. 장인 협회에서 내 거든. 즉, 이 아이스크림은 스승님 지갑에서 나온 거다 이거지. 감사.”
태랑은 크게 외치고는 신난 얼굴로 다시 아이스크림을 푹푹 퍼 먹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먹어치우고는 호리병 그릇을 가게에 반납하고 오더니 냅다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아, 진짜. 1초는 몇 달이나 지나야 가능한 건데 그걸 왜 첫날부터 하고 난리야. 분명 기죽이려고 일부러 그런 걸 거야.”
“이미 다 한 번씩 해본 수업이라고 그런 건 아니고?”
은비는 아직 반이나 남은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으며 물었다.
“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너무해. 그게 안돼서 다시 듣는 거잖아.”
“난 그것보단 이게 정말 재주 다루는 거랑 관계가 있는지가 더 궁금하던데.”
“하긴 넌 몽땅 까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좋아. 작업실을 보여주지. 그럼 이해가 갈 거야. 자, 그러니까 어서 먹어!”
태랑이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은비는 허둥지둥 아이스크림을 입에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열심히 먹고 있는데 햇살이 강해져 발치로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런데 기이했다. 그림자가 은비 혼자 뿐이었다.
‘뭐지?’
옆을 보니 분명 태랑이 앉아 있었다. 태양이 태랑 쪽에서 비춰 들고 있으니 그림자 두 개가 겹쳐져 보여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태랑의 그림자는 없었다.
“저기 너 그림자.......”
은비가 조심스레 묻는데 태랑이 아차 싶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작고 동그란 주머니 시계였는데 주머니에 넣고 다니도록 줄까지 달려 있었다.
딸깍!
시계 위에 달린 단추를 누르자 뚜껑이 열리며 시계가 보였다.
12시 1분.
은비는 어리둥절해졌다.
‘어라? 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나?’
태랑은 시계 뚜껑을 잽싸게 닫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더니 피식 웃었다.
“작업실 구경은 내일 아침에 해야겠다. 아쉽지만.”
“아침?”
은비가 눈을 끔뻑이자 태랑은 일어서며 물었다.
“응. 8시쯤 볼까? 우리 공방 앞에서 만나자.”
“왜 그래? 땡땡이라도 칠 것 마냥.”
“성격이야. 자, 다 먹었지. 이제 가자. 수업 늦겠다.”
“으응.”
은비는 아이스크림을 마저 입에 퍼넣고는 일어섰다. 허둥지둥 호리병 그릇과 숟가락을 가게에 반납하고 돌아서니 태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뭐야! 혼자 간 거야!”
은비는 기막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몇 개나 건너고 작은 길을 지났는데도 가게는 보이질 않았다.
“대체 뭐야. 뭐냐고! 나 혼자 어떻게 찾아가라고 그렇게 빨리 가버렸담.”
은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울먹였다. 길은 가도 가도 끝이 나질 않았고 기분인지는 몰라도 점점 음침해졌다.
오가는 사람들 시선이 어째 곱지가 않았다. 은비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걸었다. 그러다 도제 학교 교복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뛰어갔다.
“저기. 잠깐!”
앞서가던 아이들이 멈칫 서더니 돌아봤다. 둘 다 덩치가 무척 좋은 남자애들이었다. 은비는 허둥지둥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남자애들 목에 덧댄 거무죽죽한 빨강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무래도 다른 공방에 소속된 애들 같았는데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은비는 최대한 상냥하게 그 아이들에게 물었다.
“저기 고치는 공방이 어딨는지 알아?”
“호, 이것 봐라. 고치는 이다.”
왼쪽에 선 남자애가 말했다.
“그러게. 고치는 이가 우리더러 길을 다 묻네.”
오른편에 선 남자애가 킥킥 웃었다.
“저기 모르면 됐어. 고마워.”
은비는 황급히 말하고는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왼쪽에 선 남자애가 은비의 왼쪽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오른쪽에 선 남자애도 은비를 놓칠세라 손을 턱 올렸다.
“그러면 쓰나. 우리가 아주 잘 가르쳐 줄게.”
“그래. 그래. 우린 우등생이거든. 아주 잠깐만 우리랑 있으면 데려다 주지.”
둘 다 음침한 목소리로 떠들어대면서 손에 힘을 주는데 어깨가 엄청 아팠다.
악!
은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지나가는 어른들 중 그 누구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들 나 몰라라 제 갈 길만 바빴다.
“놔!”
은비는 몸부림쳤다. 손에서 벗어나려고 힘껏 뿌리쳤다. 하지만 둘 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놀라지 마. 네 머리카락에 멋진 장식을 좀 해주려는 거야.”
왼쪽에 선 애가 말했다.
“그래. 그래. 네 친구들이 깜짝 놀랄 거야. 아주 깜짝깜짝.”
오른쪽에 선 애가 말했다. 은비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울면 더 얕잡아 보일 테고 그러면 더 괴롭힐 거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떡해.’
그때였다.
“당장 그 손 못 떼!”
벼락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들어 바라보니 나래였다. 그 옆에는 민지도 있었다. 은비는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나래야. 민지야!”
아까 가볍게 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데도 엄청 친한 사이인 듯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구니까 도깨비는 도깨비란 소리나 듣는 거라고! 이 못된 도깨비들아!”
나래는 울먹이는 은비를 보자 화가 더 솟구친 건지 거칠게 소리쳤다.
“저 앤 뭐지? 도깨비가 도깨비한테 욕을 하네.”
오른쪽에 선 애가 말했다.
“확 일러버릴까? 다른 도깨비들에게?”
왼쪽에 선 애가 말했다.
“기왕이면 여왕께 이르도록. 내 친히 너희를 어전에서 맞아주지.”
나래가 말했다. 그러자마자 남자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서로 눈을 맞췄다.
“어전?”
“혹시.....”
갑자기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겁먹은 얼굴로 은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은비는 총알처럼 나래와 민지에게로 뛰어들었다.
“공주님이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남자애들은 장단 맞춰 외치고는 줄행랑을 쳤다. 쿵쿵대며 멀리 사라지는 뜀박질 소리가 요란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저런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야. 저 녀석들은 그러니까…….”
나래가 우물거리며 은비에게 말했다. 은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너 공주야?”
“음, 공주야.”
나래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민지가 고개를 저으며 나래를 바라봤다.
“바보. 그런 말 나눌 때가 아니잖아. 자칫하면 도깨비라서 저랬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그리고는 은비를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저 애들은 숨기는 이야. 주로 함정을 만들지. 귀한 보물을 숨기거나 남한테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때 손님들은 숨기는 공방을 찾아. 가끔은 누군가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고 싶을 때도 찾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재주가 재주꾼을 만들어. 저 애들은 저도 모르게 재주에 휘둘리는 거야. 마음까지도 말이야.”
“도깨비들이 더 잘 휘둘리는 것도 사실이지.”
나래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민지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혀를 찼다.
“안 돼. 그런 사고방식. 그리되면 도깨비는 무조건 골칫덩이란 수식이 성립된다고.”
“다들 너처럼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근데 은비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수업 안 들어가?”
나래가 물었다.
“가던 길이야. 태랑을 놓쳤거든. 갑자기 안보이더라고.”
은비가 대답했다.
“역시 여우라니까.”
나래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반면 민지는 뭐라 하는 대신 초조한 얼굴로 신경질적으로 입고 있는 저고리 끝단을 잡아당겼다.
‘왜 저러지?’
은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민지의 손목에 달려 있던 팔찌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래가 손목을 잡아채며 시간을 확인했다. 11시였다.
순간 은비는 눈을 굴렸다. 아까 태랑의 시계는 분명 12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한 시간이나 차이가 나다니 뭔가 이상했다.
‘고장 난 시계를 가지고 다니는 건가?’
“가자!”
갑자기 나래가 민지와 은비의 손을 낚아챘다. 그 순간 발이 허공에 뜨며 몸이 쭉쭉 앞으로 끌려갔다. 마치 놀이기구를 탄 기분에 은비는 소스라쳤다.
“놔줘! 무서워.”
하지만 나래는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물었다.
“지각하고 싶어? 그랬다간 준서 선배가 숙제를 산더미처럼 내줄 거라고.”
은비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은비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끌려가던 민지가 위로하듯 말했다.
“넌 기억 못 하겠지만 우리 이러고 자주 다녔어.”
순간 은비는 말문이 턱 막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민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공방에 돌아온 걸 환영해.”
다음 날 아침, 은비는 조용히 교실에 들어섰다. 어제 공방 수업 다 마친 뒤 나래와 민지의 도움으로 다시 시냇물을 건너고 보니 이미 학교 수업은 다 끝나 애들이 가방을 메고 쏟아져 나오던 참이었다.
은비는 잽싸게 교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기며 한창 뒷정리 중인 선생님을 바라봤다. 하지만 선생님은 하루 종일 은비가 없었던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일부러 꾸벅 인사까지 건네자 선생님은 그제야 알아차린 듯 은비를 보며 웃었다.
“그래. 내일 보자.”
그게 다였다.
“안녕 은비야?”
책상에 책가방을 내려놓자 친한 애들 몇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은비는 아무도 어제 일을 묻지 않는 것에 놀라며 살며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집중하면 보인다고 했지.’
어제 헤어질 때 태랑이 일러준 대로 눈에 힘을 주며 앞을 지긋이 보니 처음에는 밋밋하던 복도 위로 빛이 일렁였다. 그 출렁임이 점점 커지더니 시냇물이 보였다.
“됐다!”
은비는 기뻐하며 폴짝, 시냇물을 뛰어넘었다. 그러고 보니 공방이 있는 시장 입구였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은비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공방으로 향했다. 길이 워낙 단순해 도착하고 보니 태랑이 약속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너!”
은비는 보자마자 한 소리 하려 했지만 태랑이 활짝 웃었다.
“안녕?”
은비는 말문이 턱 막혀 입을 삐죽였다.
“이리 와봐. 준서 형 밤새서 작업 중이야.”
태랑이 공방 창에 달린 나무 창살 사이를 들여다보며 소곤거렸다. 은비는 태랑 옆에 바짝 붙어 서서 까치발을 세운 채 들여다보았다.
사방에 가루가 날려 다소 뿌옇게 보였다. 비춰 드는 아침 햇살이 곳곳에 빛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준서가 손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이 들고 앉아있었다.
언뜻 봐서는 달걀처럼 아래가 뾰족한 컵처럼 보였다. 하지만 참 많이 낡았다. 군데군데 갈라진 자국도 보였다. 준서는 바로 그 자국들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나무를 달래는 거야. 새겨졌던 문양을 떠올리도록 말이야.”
태랑이 말했다.
“저렇게 낡은 컵을 고쳐서 뭐하게? 그냥 새 걸 사면 되잖아.”
은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태랑이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고 봐?”
태랑이 한숨 쉬듯 말했다.
“저건 도깨비가 될 거야.”
“뭐가?”
“저 컵이 온전해지면 도깨비가 된다고. 도깨비는 저런 물건이 변해서 태어나는 거란 말이야.”
“뭐야!”
“쉿!”
태랑이 은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은비가 알았다는 시늉을 하자 태랑이 손을 거뒀다.
“작업 방해하면 혼난다고.”
태랑의 소곤거림에 은비도 작디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나래가 저런 물건이 변해서 된 거란 말이야?”
태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부터 나래랑 그리 친했어?”
“어제부터. 누가 날 버리고 간 덕분에 길을 잃었거든. 나래가 데려다줬다고.”
은비가 볼멘 얼굴로 말하자 태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래는 아니야. 나래는 도깨비 여왕이 재주꾼과 사랑에 빠져 태어났거든. 덕분에 도깨비 왕가가 발칵 뒤집혔었대. 도깨비들은 그렇지 않아도 재주꾼들을 싫어하거든. 그런데 왕위를 이을 공주가…….”
“거기까지!”
갑자기 창살 사이로 준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둘 다 눈이 동그래져서 바라보자 준서가 엄한 얼굴로 들어오라는 눈짓을 하더니 사라졌다.
“거봐.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태랑이 눈을 흘겼다. 은비는 기가 찼지만 못 들은 척 공방으로 들어갔다.
“형.”
태랑이 뒤따라 들어오더니 기다리고 서있는 준서를 보며 아양을 떨었다. 그러자 준서가 인상을 팍 썼다.
“선배라고 부르라 했지. 그리고 너 그 이야긴 왜 마구 떠들어대는 거야? 교장 선생님이 그러지 말라고 특별히 주의까지 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