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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은영 Nov 14. 2022

목요일의 비밀



#10.


“거짓말!”

은비는 외마디 비명 지르듯 외쳤다. 하지만 민지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은비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자신이 괴로운 듯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침착해야 해.’

은비는 아빠가 옆에 있었다면 했을 말을 속으로 되뇌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시간이 줄어들어야 태랑이 원래대로 돌아가는데요?”

“돌아간다고?”

용은 그렇게 되묻더니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낄낄낄, 케헤헤헤-.

입에서 이따금씩 불꽃이 튀어나올 정도로 웃어대는데 은비는 심장이 꽝꽝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은비야.”

나래가 은비의 손을 꽉 쥐었다. 그제야 은비는 제가 바들바들 떨고 있음을 알았다. 민지는 미친 듯이 손톱을 물어뜯다가 결심한 듯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랑은 사라지는군요. 그렇죠? 그때 공명은 끝이 나고 덮인 시간은 완전해지는 거고요.”

용이 그제야 웃음을 멈추더니 웃느라 고인 눈물을 눈가에서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용족. 그래. 그렇단다. 그 앤 내일이면 사라질 거다.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거지.”

“내가 이럴 것 같았어.”

민지가 눈을 질끈 감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은비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으려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래가 벌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정말 못됐네. 어떻게 그런 걸 만들어서 어린애한테 팔 수가 있어요?”

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팔지 못하지? 고통을 느끼는 건 어른이건 어린이건 똑같단다. 난 시간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장난감을 파는 거란다.

“장난감이라니! 목숨이 왔다 갔다 거리는 데 이게 어떻게 장난감이에요?”

“천 년의 세월을 이곳에 갇힌 체 사는 나 같은 용에게는 세상만사가 다 장난이란다. 그러지 않고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지. 이런 장난이라도 쳐야 누구라도 오지 않겠니? 친구도 없고 기를 애완동물조차 없는 이곳에서 말이야.”

용이 우울한 얼굴로 읊조리자 나래는 기가 찬 듯 고개를 젖히고는 하늘을 보며 콧김을 훙훙, 내뿜었다. 

 “반품은 안 될까요?”

은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다. 이걸 산 건 네가 아니라 그 꼬맹이잖니?”

용은 딱하다는 얼굴로 말하더니 덧붙였다. 

“다만 내가 만드는 모든 시계에는 되돌림 기능이 있단다.”

은비가 기대감이 꽉 찬 얼굴로 바라보자 용은 이빨이 다 드러날 정도로 음흉하게 웃더니 소곤거렸다. 

“시계 위에 붙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돼. 대신 은비 넌 잊었던 기억을 모두 떠올려야 할 테니 꽤 아플 거야.”

은비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버튼을 꽉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키키키, 케헤헤헤-.

용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코 밑에 달린 수염이 너풀너풀거렸다. 은비가 자신의 말에 울고 웃는 게 재미난 모양이었다. 은비는 기가 차 용을 노려 보았다. 

‘저 수염을 뽑아 버릴까?’

그러자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뽑자. 단숨에 뽑아 버리는 거야. 엉엉 울릴 수 있어.’

귀를 긁는 기묘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은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진짜로 저 용의 수염을 단번에 뽑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깐!”

용이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쳤다. 은비는 손에 모이던 힘이 휙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용은 그걸 아는지 은비의 손을 흘끔 보더니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려는 게 아니었어. 그건 실수 방지 용이란다. 산 사람이 눌러야 되돌릴 수 있어. 만약 다른 사람이 제멋대로 누르면 어떻게 되겠니?”

“그래서 어쩌겠단 거예요? 우린 태랑이 어딨는지도 모른다고요!”

민지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악을 썼다. 용은 손톱으로 콧잔등을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틈을 비집고 은비를 넣어주지. 분명 태랑은 은비가 진실을 보게 된 걸 알고는 나타날 게다. 두 사람 사이의 진동이 요동을 칠 테니까. 하지만 태랑이 그러고도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긴 하지만.”

은비는 그제야 어깨에 들어갔던 긴장을 풀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용은 실실 웃으며 입을 꼭 다물고만 있었다. 

“대가가 뭔데요?”

민지가 툭, 물었다. 그제야 용이 입을 열었다. 

“역시 용족의 아이구나. 맞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어야지. 난 다른 용들과는 달리 황금이나 보석은 받지 않아. 난 희귀한 걸 받는다.”

“아저씨에게 희귀한 게 뭔데요?”

나래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비와 눈을 맞췄다. 

“여덟 번째 소녀의 일기장. 난 그걸 원한다. 그건 아홉 번째 소녀만이 찾을 수 있지.”

순간 민지와 나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 다 아홉 번 소녀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재주꾼 세상을 파멸시킬 재주꾼 소녀.’

은비는 교장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민지와 나래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이윽고 민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저 용은 바로 그걸 위해 태랑을 끌어들인 거야.”

그러자 용이 히죽 웃었다. 

“내가 바라는 대가는 그것뿐이야. 만약 그 대가를 한 달 내로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우 태랑은 소멸한다.”

은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찾아다 드릴게요. 이제 보내주세요.”

“그래. 널 믿으마.”

용이 손가락을 튕겼다. 

거실을 가로질러 느릿하게 오가던 진자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바람이 일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은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은비는 아주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다.

“은비야! 아빠 좀 봐봐!”




은비는 눈을 번쩍 떴다. 황당하게도 코 앞에 1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서있었다.  

“세상에, 은비야. 아빠가 보이는 거야!”

아빠가 엄청 좋은 듯 펄쩍펄쩍 선 자리에서 뛰어댔다. 은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과거로 돌아온 걸까?’

하지만 아빠 뒤로 보이는 냉장고에 붙은 달력은 분명 오늘 날짜였다. 흘끔 옆을 보니 식탁 위에 다 만들어진 햄버거가 놓인 게 보였다. 먹고 싶었지만 그림자 용의 도시에 가야 해서 못 먹고 말았던 바로 그 햄버거였다. 

“아빠, 설마 유령이야?”

은비가 물었다. 아빠는 대답 대신 은비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아빠는 한껏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딸이 아빨 보고 말을 걸다니 너무 좋다.”

은비는 어리둥절해하다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1년 전, 아빠가 죽었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랬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쩐지 공방에서 첫 수업을 듣던 날, 태링이 오후 수업에 들어왔다고 믿으며 한 번도 확인해보려 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했다. 

“어디 우리 딸 좀 제대로 보자.”

아빠가 은비의 어깨를 잡고 조금 물러서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은비는 아빠를 바라보며 볼을 부풀렸다. 

아빤 1년 전과 참 많이 달랐다. 예전처럼 수염을 기르지도 않았고, 머리가 더부룩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몸까지 가벼워 보였다. 마치 고치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도 같을 줄 알았는데 아빤 너무 기쁘다. 근데 엄만 어딨니?”

아빠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했다. 

“나 만날 이랬어? 그러니까 1년 내내 내가 아빠를 못 본 척했어?”

은비가 조용히 물었다. 아빠는 얼굴을 붉히더니 은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아빤 매일 널 보고 싶어. 하지만 너희 엄마가 목요일만 허락했어. 의사도 일주일에 딱 하루가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목요일마다 왔어. 보통은 아침에 너랑 아침 먹으러, 가끔 아빠가 일이 있으면 이렇게 저녁에 왔지.”

“뭐?”

은비는 토할 것 같았다. 목요일 아침, 아빠가 만든 것 같은 음식을 놓고 기다리던 엄마가 떠올랐다. 싱크대에 기대선 채 차갑게 바라보던 그 눈길도. 

‘내가 왜 아빠를 기억에서 지우려 한 거지?’

갑자기 은비는 혼란스러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희 엄마가라니? 아빠 왜 그렇게 말해?”

“미안해. 하지만 이젠 함부로 부를 수 없으니까.”

“무슨 소리야?”

“은비야. 더 이상 그러지 마. 아빠가 잘못했어. 용서해주면 안 될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은비는 성을 냈다. 그 순간 주방으로 웬 아줌마가 아기를 안고 들어섰다. 이제 막 태어난 듯 강아지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갓난아기였다. 

“안녕? 은비야. 오랜만이네. 아줌마가 보이니?”

아줌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은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나았구나.”

그 순간 아기가 옹알이를 했다. 포동포동한 뺨이 실룩거리는 게 너무 귀여웠다. 은비가 넋을 놓고 바라보자 아빠가 다짜고짜 아기를 건네주었다.  

“안아보렴.”

은비는 품 안 가득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에 미소 지었다. 

“동생 예쁘지?”

아빠가 다정하게 물었다. 하마터면 은비는 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줌마가 눈치를 챘는지 손을 뻗어 잽싸게 아기를 데리고 갔다. 

은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아빠와 아줌마를 번갈아 바라봤다. 

뎅, 뎅, 뎅-.

마루에 있는 괘종시계가 열 두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늦은 밤, 함께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은비의 동생이라는 갓난아기. 조각난 퍼즐 조각이 하나씩 들어맞으며 은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떠올랐다.

“아빠 이혼했어?”

“그래. 1년 전에.”

아빠가 소곤거렸다.

“그리고 저 아줌마랑 결혼했어?”

은비가 다시 물었다. 아빠는 쩔쩔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비는 순간 제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뭔가가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목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제멋대로 튀어나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난 아빠가 죽은 줄 알고 만날 만날 밤마다 울었어. 하지만 그건 날 사랑하는 아빠라서야. 딴 여자를 사랑하는 아빠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알아? 어떻게 엄마랑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아빠가 할 말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옆에 서있던 아줌마가 다소 차가운 낯빛으로 말했다.

“은비야. 물론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빤 아빠야.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는 거 이제 그만둬. 안 보이는 척도 그만해. 네 아빠가 얼마나 힘들어했는 줄 알아? 너만큼이나 힘들어했어.”

은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은비는 아줌마를 확 밀쳤다. 아줌마가 비틀거리며 벽에 부딪쳤고, 덩달아 아기가 울음을 터트렸다. 

은비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있는 힘껏 식탁 의자를 발로 찼다. 의자가 꽈당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릇이고 뭐고 다 집어던졌다. 

“은비야!”

아빠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은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현관으로 뛰어갔다. 

“은비야. 제발!”

아빠가 말리려 들었지만, 아줌마가 잡아챘다. 

“관둬요. 한껏 성질부리게 놔두라고요. 저래야 병도 다 낫지.”




은비는 이를 악물고는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쪽에는 밤나무가 달 아래 조용히 서있었다. 은비는 밤나무 뒤로 돌아가 몸을 숨기고는 울음을 토해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까맣게 잊고 지냈던 1년 전 일이 떠올랐다. 

엄마 몰래 친구랑 시내로 놀러 갔다가 우연히 아빠랑 아줌마랑 함께 있는 걸 본 기억이 떠올랐다. 화가 나서 아줌마의 원피스에 주스를 집어던졌다가 아빠한테 뺨을 맞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아빠랑 엄마랑 밤새도록 싸우고는 둘 다 집을 나가버려 혼자 남겨졌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날 밤 차라리 죽겠다고 수면제를 잔뜩 먹고는 병원에 실려 갔던 기억도 떠올랐다. 하나 둘, 하나 둘.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줄을 지어 일어섰다. 

은비는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몇 개 안 되는 기억들이 이렇게 사람을 절망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니. 어제만 해도 꿈꿨던 그 모든 것들이 다 허투로만 느껴지다니.

“싫어. 지워 줘. 제발. 이 기억을 지워줘!”

은비는 밤나무를 때리기 시작했다. 주먹이 쓸려서 아파왔다. 피가 맺혔지만, 고통을 느낄 수가 없었다. 대신 가슴이 아팠다. 때리면 때릴 수 록 숨통이 컥컥 막혀왔다. 

“그만둬.”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은비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따뜻한 손길에 은비는 주먹질을 멈췄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돌아서서 보니 과연 태랑이었다. 은비는 엉엉 울며 태랑을 바라봤다.

“시간의 용이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태랑은 한숨을 내쉬며 묻더니 은비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시계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12시 40분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고 그게 태랑의 남은 시간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면 태랑은 소멸할 거다. 

은비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이러고 울 때가 아니었다. 은비는 소맷부리로 대충 눈물을 훔치고는 태랑의 손을 잡았다. 

“버튼 눌러. 그러면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돌아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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