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서나 보곤 하던 색색의 별들이 무리 지어 까만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은비는 경이감에 빠져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빨간 안개에 휩싸여 오묘한 모양을 그리고 있는 별들의 무리가 있었다. 파랗게 빛나며 뱅글뱅글 도는 별들의 무리도 있었다. 번쩍번쩍 터지는 빛에 휩싸여 꿈틀거리는 별들의 무리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가끔 보여주던 바로 그 우주다.
“굉장해.”
은비는 감탄하며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봤다. 보석이 박힌 듯 아름다운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구불거리는 길이 이어졌다.
유리로 된 길은 단단했지만 아주 투명해 꼭 허공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양 옆으로는 투명한 유리 상자가 놓여있었다. 거대한 상자 한가운데는 각양각색의 물체들이 둥실 떠있었다.
위아래로 어디든 오갈 수 있는 4차원 계단 미로, 화려한 꽃들로 이루어진 꽃다발, 각종 연필과 펜, 붓들이 꽂힌 필통, 천으로 만든 인형, 흙으로 빚은 찻주전자, 그리고 주머니 시계. 그 뒤로도 물건들이 줄줄 이어졌지만 은비가 선 곳에서 보이는 건 거기까지였다.
물건들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탓인지 신비롭고 아주 멋져 보였다. 죄다 아주 신비로운 마법의 힘이라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곳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해 봤어.”
은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민지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처음 드나들 때는 그랬어. 그래서 교칙 위반인 걸 알면서도 드나들었지.”
“좋아할 만하네.”
나래가 민지를 툭 치며 말했다. 은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민지를 보며 웃었다.
“진짜 멋지다. 난 그림자 용의 거리라기에 그냥 어두침침한 그런 곳을 생각했거든.”
“나도 그랬어. 이런 곳을 왜 금지구역으로 만들었을까 싶었지. 용족의 도시에서도 이렇게 조용하고 산책하기 좋은 데는 별로 없거든.”
민지는 그렇게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길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인지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미로가 담긴 거대한 유리상자를 휙 지나쳤다.
“어라? 신기해.”
은비는 뒤로 한 발자국 걸어보았다. 기대한 대로 몸이 밀려났다. 은비가 신나 하며 손뼉을 쳐대자 민지가 걸음을 멈췄다.
“그만해. 안에서 보고 있을 거야. 저거 밖은 거울이고 안은 창인 그런 유리거든.”
은비는 화들짝 놀라 얼른 걸어 민지 곁에 섰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민지는 말을 이었다.
“역시 눈치 못 챘구나. 저 상자들이 바로 가게야. 뭐, 저 안에 사는 용들에게는 감옥인 셈이지만. 절대 저 밖으로는 못 나오거든.”
“난 그냥 장식품인 줄 알았어.”
은비가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나래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이마를 치며 외쳤다.
“재주꾼 오 형제가 위험한 용들을 상자에 가뒀다더니 저게 바로 그거구나!”
“응. 맞아. 그래서 난 여길 좋아해. 재주의 궁극이 무엇인지 보여주잖아. 태랑한테 알려준 것도 그래서였어. 하도 우울해 하기에 힘 좀 내라고 그런 건데…….”
민지는 풀 죽은 얼굴로 말끝을 흐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은비와 나래도 얼른 뒤를 따랐다.
셋은 주르륵, 몇 개나 되는 가게를 순식간에 지나쳐 주머니 시계가 담겨 있는 상자 앞에 멈춰 섰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에 두 발을 내리자마자 셋은 바로 작은 문 앞에 서있었다.
“그럴싸해 보여도 그림자 거리의 용은 결국 그림자라는 말이 있어. 용족의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라는 말이지. 너희도 기억해둬.”
민지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은비와 나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똑-.
민지가 유리문을 두드렸다. 문이 투명해지며 안이 들여다보였다.
얼핏 은비는 털이 보송보송한 흰색 카펫 위에 탁자와 푹신한 소파가 놓인 것을 보았다. 하지만 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투명한 막이 가로막고 있었다.
‘어떡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거지?’
그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민지가 불쑥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음식 위에 씌우는 랩처럼 민지의 모습 그대로 문을 막은 투명한 막이 쭉 늘어났다. 하지만 좀체 뚫리지가 않았다.
“안 되겠다!”
나래가 민지의 등을 떠밀었다. 막을 늘어나고 또 늘어나다 어느 순간 흐물거리며 드디어 민지가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마자 거짓말처럼 막이 사라지며 민지는 상자 안에 서있었다. 나래가 방법을 이해한 듯 막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박에 쭉 늘어나던 막은 나래가 발을 문 너머에 딛자마자 확 뒤로 물러섰다
‘흠. 그러니까 발만 닿으면 된다 이거지.’
은비는 어째 끈적거리는 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뭔가를 차듯 다리로 막을 밀며 바닥을 향해 내디뎠다. 그저 스치듯 닿았을 뿐인데 막이 사라지며 은비는 나래 앞에 서있었다.
“너 눈썰미가 좋구나.”
나래가 손뼉을 쳤다. 민지가 꽤 진지한 얼굴로 막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며 말했다.
“재주로 짜인 막이네. 낮에 본 용도 이런 막에 갇혀 있던데 같은 걸까?”
“아마도. 늘어나는 게 어째 비슷하잖아.”
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린 뚫었잖아.”
은비가 말했다. 나래와 민지가 동시에 은비를 바라봤다.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민지가 그제야 떠오른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맞다. 너 짜는 공방에 가본 기억이 없겠구나! 우리 다 같이 지난해 견학 실습 갔었는데. 그러니까 이 막은 용이 나가지 못하게 재주를 부려 짠 거야.”
“아하, 그래서 재판정에서 그 용이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밀어대는 데도 괜찮았던 거구나.”
은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지의 눈동자가 또 세로로 섰다.
“그렇지. 아마도 이 막은 위대한 오 형제 중 네 째가 만든 걸 거야. 네 째는 우리 용족 출신이거든. 자신이 가진 재주를 우리 용족의 기술력과 결합해 거대화 시킨 거겠지. 이렇게 거대한 짜인 막은 다시 만들기 힘들 거야. 사실 이건 재주를 부린 후 시안화 화합물을 도포한 뒤...........”
“네. 네. 어련하시겠어. 류민지 님. 자, 가자. 이러고 있다가 날 새겠다.”
나래가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손을 마구 저어댔다. 민지의 눈동자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어째 살짝 뾰로통해진 낯빛으로 민지는 앞장을 섰다.
“삐졌나 봐.”
은비가 중얼거리자 나래가 피식 웃었다.
“화학 공식을 듣기 시작하면 그런 걱정 안 하게 될 걸?”
안에서 밖이 보이는 유리라더니 상자 안에서는 우주가 그대로 내다보였다.
별들이 춤을 추며 뱅뱅 돌고, 유성이 길게 빛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은비는 1층 한가운데 놓인 긴 소파에 앉아 멍하니 구경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안되지. 안돼. 태랑이 구하는 게 먼저야.’
은비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소파 위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거대한 금속 구슬을 보았다. 그건 거실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은비는 저도 모르게 진자를 따라 눈을 움직이다 고개를 젖히니 까마득한 높이의 허공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금속 줄이 보였다. 아무래도 단순한 구슬이 아니라 괘종시계에 달린 시계 추 같았다.
“여긴 아무도 없어. 저 계단으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
나래가 손을 들어 맞은편에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제야 은비의 눈에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계단이 들어왔다. 유리벽에 바짝 붙어 설치된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놓인 계단참은 방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2층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고 3층은 침대가 보였다. 다시 4층은 하얀 욕조가 떡 하나 자리했다. 그 위로도 뭔가 더 있겠지만 잘 보이질 않았다.
어느 틈에 은비는 고개를 할 것 젖히고 계단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지도 나래도 마찬가지로 그러다 어지러운지 비틀거렸다.
“더는 못 보겠어.”
나래가 가장 먼저 고개를 내리며 끙, 앓았다. 뒤따라 민지도 고개를 숙이며 주저앉았다.
“왜 이걸 보고 있는 거지?”
은지도 고개를 내리고는 목을 주물렀다.
“그러게. 왜 그랬지?”
셋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 경쾌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이런, 이런. 어디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만.”
불쑥 소파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비는 너무 놀라 웃음을 꿀꺽 삼켰다.
어느 틈에 용 한 마리가 소파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몸집도 키도 은비랑 비슷했다. 팔은 있지만 다리는 없어 길게 늘어진 꼬리가 소파 아래 돌돌 말려 있었다.
아까 시내를 건널 때 봤던 민지의 모습처럼 사슴뿔에 메기수염이 달린 돼지 코를 가졌는데 그 끝이 촉촉해 반짝거렸다.
“귀여워!”
은비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질렀다. 용이 꿀꿀거리며 웃어댔다.
“날 보고 저렇게 좋아하다니 천 년 만에 처음인 것 같군.”
목소리조차 장난꾸러기 남동생 같았다. 하지만 민지와 나래는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용을 노려봤다. 은비는 뒤늦게 친구들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민지와 용이 눈싸움하듯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민지가 은비를 향해 턱짓을 했다. 은비는 그 신호를 바로 알아듣고는 주머니에서 태랑의 시계를 꺼내 들었다.
“이 시계 때문에 왔어요.”
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시계를 바라보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하, 그렇군. 그 꼬맹이의 시간을 받은 것이 꼬마 아가씬가?”
“시간을 받아요?”
은비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용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하긴 꼬마 아가씨는 모르겠지. 당연해. 그래서 그 꼬맹이는 어쩌고 온 거지? 시계가 온전한 걸 보면 아직 존재할 것 같은데.”
은비는 민지를 바라봤다. 민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루가 두 시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흠. 그래? 얼마 안 남았군. 하루 반나절 정도면 시계가 녹아버릴 거야.”
용이 별 일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민지도 은비도 나래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은비는 속이 바들바들 떨려오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일단 다들 좀 앉으렴.”
용이 의자를 눈짓했다. 들어설 때만 해도 긴 소파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는데 이제 보니 사각형 모양으로 총 4개의 긴 소파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손님 수에 맞게 이런 것도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죠.”
민지가 새침한 얼굴로 답하며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래는 그 옆 소파에 앉을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민지가 바라보자 냉큼 민지 옆에 붙어 앉았다. 은비도 그래서 나래 옆에 앉았다. 그렇게 셋이 쪼르르 앉자 용이 손가락을 튕겼다.
“손님이 오셨으니 대접을 해야겠지?”
마법처럼 탁자 위에 달달해 보이는 생크림이 올라간 코코아가 담긴 세 개의 잔이 나타났다.
“자, 다들 마시렴. 이건 내 수제 코코아란다. 저 위쪽에 있는 밭에서 거둔 코코아로 만든 거지.”
은비는 거절하기도 뭐해 잔을 집어 들었다. 살짝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기분이 확 좋아졌다. 코코아는 따뜻하면서도 달콤했다. 뭐랄까 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맛있어.”
은비는 감탄하며 다시 컵을 입에 댔다. 그러고 들이켜려는데 민지와 나래가 그만 마시라는 눈짓을 했다.
‘또 실수했네.’
은비는 당황해 얼른 컵을 탁자에 내려놨다.
“의심쟁이들이군. 코코아에 내가 뭔가 나쁜 짓이라도 했을까 봐 그러는 거니?”
용이 메기수염을 꿈틀꿈틀 거리며 말했다.
“모르는 용한테 먹을 것을 함부로 받지 말라고 배웠거든요.”
민지가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굴면 말이지. 이 아저씨는 마음이 상한단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어 지지.”
용이 툴툴댔다.
“마음대로 하시죠. 그럼 당장 하루방족에게 달려갈 거니까.”
나래가 말했다. 용은 킬킬 웃어댔다.
“날 신고하겠다? 그럼 그 녀석도 큰일 나는 거 아닐까? 이 거리는 너희 같은 꼬맹이들은 절대 사절이라고 알고 있다만.”
“태랑을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전 하나도 겁 안 나요.”
은비가 소리쳤다. 용은 두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용감하구나. 좋아. 말해주지. 그 시계는 일종의 공명 장치란다.”
은비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용이 말을 이었다.
“A와 B라는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꾸나. A는 시간이 남아돌고 B는 지우고 싶은 시간이 있는 거지. 하지만 시간은 연속선상에 있어서 무턱대고 지울 수가 없어요. 그걸 채울 혹은 덮을 무언가가 필요하지. 그랬을 때 그걸 A가 자신의 남아도는 시간으로 덮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용은 다른 사람이 아닌 은비에게 대답을 듣고 싶은 듯 뚫어지라 바라봤다.
“모르겠는데요.”
은비가 솔직히 대답했다. 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더니 말했다.
“답은 그 시계를 사는 거지. 서로의 시간을 공명을 통해 주고받게 된다 이거다. 그랬을 경우 B는 지우고 싶었던 그 시간부터 다시 살게 될 테고 A는 남아도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끼게 된단다. 해 뜨는 걸 봤는데 숨 쉬고 나면 밤이더라. 이런 이야기지.”
“저게 무슨 소리래?”
나래가 어이없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민지가 물어뜯은 손톱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태랑이 은비의 시간 위에 자신의 시간을 덮어 씌우는 중이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