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넛 Oct 04. 2023

학생 왕돈까스 먹어

학생 말고 동생

언젠가 엄마가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너희가 다른 삶을 살아서 좋아. 직장 생활하는 딸래미 모습을 보면 ‘나도 결혼하고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런 삶을 살았을까’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한 아이에게는 먼저 엄마의 삶을 살아봤으니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좋고. 그 재미가 있는 거지. “


엄마가 말한 첫 번째 딸래미는 나고,

두 번째는 동생이다.


30대 중반이 넘도록 미혼에 직장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20대에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기르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엇하나 비슷한 게 없었던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어렸을 때야 치고받고 말싸움도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인생이 다 그렇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며 함께 나이 들어감을 토닥여주는 동지가 되었다.


동생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단 둘이 보는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운 좋게도 평일 낮에 둘 다 시간이 돼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오늘의 코스는 조조영화를 보고, 왕돈까스를 먹고, 카페에 간 후 헤어지는 것.


추석연휴를 노리고 개봉한 ’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가족끼리 보기 무난한 영화였지만 뭔가 대박적인 재미나 웃음이나 감동을 크게 주지는 못했다.

‘이거 이거. 오랜만에 아이들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 동생인데, 재미없어하면 어쩌지 ‘ 싶어 영화 중간에 옆을 보니 동생은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재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표정.


영화가 끝나고 물어보니,

“응! 볼만한데? 무난하게 재밌어.”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지만 다음 코스로 이동해야 한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영등포의 ‘희락’이라고 하는 돈까스집.


이 왕돈까스집을 고르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이전에 제천 여행에서 대왕돈까스를 먹어보려다 대기가 많아서 못 먹고 돌아왔던 적이 있는데, 내가 아쉽다는 얘기를 몇 번 했더니 길동이가 기억해 뒀다가 영등포에도 ‘희락’이라는 왕돈까스집이 ‘손바닥보다 더 크다’, ‘진짜 왕이다’ 라며 가보라고 알려준 것이다.

돈까스에 맺힌 한을 풀어주려는 듯 평소와 다르게 다소 격양된 톤으로 말하는 길동이를 보니 여기는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된 것이다.


‘희락’은 직장인들이 점심에 들르는 소박한 경양식 돈까스집이다.

조조영화가 끝나고 딱 점심시간대에 도착해서인지 잠시 대기한 후 입장할 수 있었던 만큼 근처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다.



잠시 뒤에 나온 돈까스는 길동이의 말처럼 거대했다.




돈까스 두 개 시켰으면 정말 다 못 먹었을 것 같은 거대함.

돈까스에 쫄면을 시키길 잘했다며 잠시 자화자찬을 나눈 뒤 우리는 양쪽에서 돈까스를 썰기 시작했다.


“언니, 이거 진짜 크다”

“와, 예상은 했지만 진짜 크네. 우리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

“응. 다 먹을 수 있음.”

미래라도 보고 온 것인가? 단호한 그녀의 대답처럼 우리는 돈까스와 쫄면을 완벽하게 해치웠다.


뭐든 어중간한 나와 다르게, 동생은 어딘가 철저한 면이 있다.

항상 밥상도 깔끔하고 예쁘게 차려놓고, 양육과 가사에서도 발군인 프로 주부다. 그녀는 프로 주부력을 발휘해 일정한 인컴도 있다. 내가 칭찬을 하자, 동생은 항상 철저한 건 아니라며 귀찮을 때는 냄비채로 먹는 날도 있고, 애 키우다 보면 주방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며

“언니, sns에 나오는 게 다는 아니야.” 하고 웃었다.

“하긴? 그렇긴 하겠다. 보이고 싶지 않은 현실적인 부분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진 않을 테니까.”

“그럼, 그럼. 나도 이쁘고 잘 나온 것만 올리는 거야.”

“그래도. 그거 이쁘고 잘 보이게 하는 것도 능력이야.”

나 같은 똥손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는 법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리스펙 해주었다.


동생은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잠깐 생기는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 자유롭고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잠깐만 봐도 이모의 기를 쪼옥 빼놓는 아이들과 하루종일 붙어있는 건 정말 쉽지 않겠지.


엄마가 된 동생의 푸념은 가끔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동생의 가정, 동생의 세계는 이렇게나 멀리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가깝게 만나서 제3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너무 같은 삶만 있는 것도 재미없지 않을까?


왕돈까스와 쫄면을 나눠먹으며 보낸 이 시간에서

나는 회사를 가지 않는 평일의 이 여유로움을,

동생은 양육에서 잠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꼈다.


잠깐의 자유를 만끽한 후,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삶에서 에피소드를 만들고,

다르니까 더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고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특기는 CCTV 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