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넛 Oct 06. 2023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기술의 한계

나는 점심에 주로 혼밥을 한다.


이 날은 날이 다소 쌀쌀한 탓에 따끈한 우동이 먹고 싶어서 회사 근처에 우동을 파는 가게를 찾아 나섰다. 배도 고팠기 때문에 돈까스에 우동이면 좋을 것 같다.


가게에 들어가니 자리에 키오스크가 있다.

등심돈까스와 미니우동을 주문했고,

잠시 후….


돈까스 우동 세트


나: …???!!

종업원: ^^??

나: …어..우.. 어ㅓ…??

종업원: …^^???? 맛있게 드세요.


당황한 나는 뻐끔뻐끔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고 종업원분은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후 상큼하게 돌아가셨다.


문제는 뭐였 나면, 미니우동이 두 개 나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등심돈까스에 미니우동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나는 미니우동을 추가한 것이었다. 우동을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본 돈까스가 우동이 곁들어 나오는 세트라는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주문한 내 잘못이 맞았지만 조금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대면으로 주문했더라면 ‘돈까스에는 미니우동이 포함되어 있는데, 추가로 우동을 더 주문하시는 게 맞으신가요?’라고 확인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망할(?) 키오스크는 그 정도의 주문확인은 해주지 못한다.


이미 음식은 나왔고,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주문한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우동을 두 그릇이나 먹어야 한다. 추가로 주문한 미니우동은 세트에 포함된 것보다 양이 많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저녁을 스킵하는 걸로…


다 먹고 나니 배가 빵빵해졌다.

맛있는 한 끼였지만 억울한 마음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탓할 사람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테이블 한켠의 키오스크를 째려보는 것뿐.


최신 기술의 최전선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기술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현장에 있기 때문에 더 느끼는 것이려나?)


AI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지만 정작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고, 맞춤형 최적화 광고기술이 무색하게도 항상 쇼핑몰과 배달 어플 메인 페이지를 무한대로 내리며 내가 원하는 상품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좋아지고 있는 거 맞는지? 너란 어플은 왜 아직도 날 모르는 건데?!!)


과거에 다니던 회사 중에 A/B테스트를 굉장히 열심히 하던 회사가 있다. 정말 사소한 기능부터 메이저한 개편까지 사용자에게 노출되는 것이라면 A/B 테스트를 태우던 회사였다.

A/B테스트의 가장 큰 장점은 윗분들의 감이 아닌 실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서비스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A/B를 엄청 신뢰하던 신봉자 중 하나였는데, 어느 날 이 신뢰에 금이가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광고 콘텐츠 중에 A/B 테스트 결과가 좋은 B안이 채택되었는데, B안의 메시지가 너무 자극적인 것이 문제였다. 클릭률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낚시성으로 오해할 수 있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어어 장기적으로 회사 브랜드에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것 같았다. 결국 다수의 직원들이 입을 모아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내서, B안의 메시지는 수정되었다.


A/B 테스트라는 좋은 기술을 써도, 결국 A안도 B안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데이터가 주는 의미 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고 판단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던 사건이었다.


지금 이 미니우동만 해도 그렇다.

내가 키오스크 화면 안의 메뉴 구성을 조금 더 유심히 보았다면, 혹은 주문서를 뽑아본 종업원이 미니우동 추가에 대한 작은 의구심을 가졌다면… 나는 조금 더 적절 양의 최적화된 식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기술만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주의 깊게 메뉴를 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절멸 식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