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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Oct 08. 2023

취미의 온도

경기국제웹툰페어 후기


“OO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말에는 함부로 좋아한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전문가처럼 그 분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좋아하더라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나 혼자 몰래 조용히 좋아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가 오타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오타쿠란 특정 분야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일본 드라마, 웹툰, 서브컬처에 흥미가 있고 꽤 오래전부터 나의 취미라고 생각해 왔고 주말이나 틈 날 때마다 관심 가는 작품 한두 개는 관람하곤 했다. 만화가 너무 좋아서 서툴지만 끄적끄적 인스타툰도 그리시 작한 거니까. 나름 열정이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개최된 경기국제웹툰페어에는 기대를 많이 했다. 코스튬플레이를 하는 코스어도 많을 거니까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작품 부스에 가서 스티커랑 굿즈도 사야지 하고 부분 마음을 안고 있었다.


그렇게 기대하던 주말이 왔고,

킨텍스에 방문한 나는…


좌절했다…..


코스어는 많았지만, 내가 아는 작품 캐릭터가 없었다.

아니야, 설마. 요즘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을 내가 놓치고 있는 건가. 관람장 안에 들어가면 아는 작품들이 많을 거야…

삼삼오오 모여있는 코스어 젊은이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괜히 주눅이 들며 와서는 안될 곳에 온 것만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와버린 아줌마의 흔들리는 동공을 눈치챈 사람이 없길 바라며 서둘러 관람장 안으로 발을 옮겼다.



경기국제웹툰페어 입장


쿵쾅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웹툰페어에 입장했는데…

역시나 내가 아는 작품이 없었다.


매월 정기 결제했던 웹툰 포인트가 무색했다….

나… 웹툰유행에서 뒤처지고 있는 건가..?


넓은 관람장 안을 한 바퀴 돌았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귀엽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전에 내가 이것들을 ‘모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아서 깜찍하고 멋진 다른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 자부했던 것들에 대해서 이다지도 깊이가 없고 몰랐구나…

며칠 전부터 기대했던 마음이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밝은 표정으로 하하 호호 관람하는 사람들과 멋진 표정과 자세로 포즈를 취하는 코스어들 사이에서 나 홀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취미들을 잃어버린 것인가.

갑자기 온몸에서 소심함이 뿜어져 나와 관심 있었던 부스에 다가가지 못하고 쭈뼛쭈뼛 멀찍이 구경만 하다 관람장을  나왔다…

원래 하고 싶었던 코스어와 사진 찍기나 스티커와 굿즈도 사지 못했다.

아, 나는 왜 이다지도 소심할까.


내가 오프라인에서 두려워하는 공간들이 몇 있다. 미용실, SPA브랜드가 아닌 옷가게, 올리브영이 아닌 화장품 가게, 가전/전자제품매장. 이제는 웹툰페어도 추가해야겠다.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곳들이다.


열정 뿜뿜 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열정이 보잘것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집에와서 입장권 팔찌만 괜시리 찍어봤다.



털레 털레 집에 돌아오니 무기력감이 휘몰아쳤다. 나는 얕은 우울감을 느끼며 잠에 빠졌다. 눈을 좀 붙이고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실망하고 질투를 느낀 것일까.

그건 바로, 내가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분야가 사실은 타인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열정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뜨거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람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실망케 했다.

(여러분은 지금 오타쿠에게 질투를 느끼는 오타쿠를 보고 계십니다)


밥 한술을 더 뜨자 긍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다.

그래, 취미를 대하는 온도는 각자 다른 것이다.

누군가는 웹툰 캐릭터가 미치도록 좋아서 코스튬플레이를 할 정도지만, 또 누군가는 잔잔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작품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작품들을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라고 취미인 거 아닌가?!


나는 왜 취미를 일처럼 대하고 있던 것인가.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애초에 취미라는 것은 전문 영역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즐기기 위한 것이니까, 타인에 비해 조금 낮은 온도라고 해도 좋아하는 이 마음 자체가 없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온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즐기면 되는데. 왜 타인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했던 걸까.

이렇게 생각하니 즐기지 못했던 웹툰페어가 아쉽게만 느껴진다. 다시 가면 정말 잘 즐길 수 있을 텐데… 내년도에는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야지.


내년까지 나의 미지근한 온도가 끊기지 않고 계속되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들을 순수하게 즐기고 꾸준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이게 내가 취미를 대하는 온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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