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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Oct 05. 2023

절멸 식당

기억할게

미술학원을 다녀온 후, 점심을 먹고 산책 겸 도서관에 갔다 오는 게 요즘 나의 주말 루틴이다.

도서관까지 함께 하는 친구는 역시 길동이. 주절주절 내 희한한 얘기를 다 받아주는 친구는 길동이 뿐이다.


“길동아, 저기 봐봐. 되게 웃기다.”

“뭐가?”

“아니, 저기 호프집 이름 봐봐. ‘깊고 진한 맛의 호프집, 맹물’ 푸하하하하하. 맹물이래. 호프집인데 가게 이름이 맹물이야. “


웃음 버튼을 눌러버린 호프집 ‘맹물’ 때문에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인데, 길동이의 표정이 싸늘하다. 아무 말이나 다 받아주지만 유머에는 가혹한 길동이.

“아아니, 술을 파는 가게인데, 맹물이잖아. 블랙 조크 아냐? 너무 웃긴데. 안 웃겨? “

누가 그랬는데. 설명이 필요한 유머는 실패한 유머라고. 길동이는 마지못해,

“그래, 웃기네.” 하고 받아주었다.


호프집 ‘맹물’은 도서관 가는 길에 있는 소박한 맥주집으로, 건물 외벽이 까만 필름으로 둘러싸여 있고 간판은 휴먼편지체에 가까운 글꼴로 ’ 맹물‘이라고 쓰여있다. 멀리서 찾아오는 맛집은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두 잔 기울일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가게다.

주로 낮에만 보다 보니 가게가 오픈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문 닫힌 가게는 어떻게 보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옛날에 본 일본 드라마 중에, ‘제쯔메시로드’라는 드라마가 있거든? ‘제쯔메시’의 ‘제쯔‘가 ’ 절멸하다 ‘ 할 때의 ’ 절‘이고 ’ 메시‘는 ’ 밥‘ 그러니까 무슨 내용이냐면, 샐러리맨 아저씨가 차박을 하면서 절멸할 것 같은 식당을 찾아다니는 드라마야. 작은 동네의 소박하지만 대를 이어 영업할 것 같지 않아서 언젠가는 문을 닫을 것 같은 식당을 찾아다니면서 세상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밥을 먹으러 다니는 거지. “

내가 길게 말하자 길동이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식당이야. 절멸 식당.”

“멀쩡하게 영업 잘하는 가게 절멸시키지 마라.” 길동이가 꾸짖는다.

“아니, 근데 좋은 의미로. 옛스럽다는거지.” 연 모습을 본 적도 없고, 가 본 적도 없는 가게지만 왠지 사장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다급히 변명을 붙였다.


“그런데 그 드라마, 끝까지 못 봤어.”

“왜? 네가 딱 좋아할 스타일인데?”

“……. 주인공 아저씨가 너무 못생겼어.”

“으이구.”


테레비 도쿄 ‘제쯔메시로드’


대를 잇지 못하는 가게는 언젠가 없어진다. 아니, 대를 잇는다 하더라도 맛이란 건 변질되고 바뀌어갈 테니, 지금 내가 먹는 이 밥과 똑같은 맛이란 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서글퍼진다.


영원한 건 없다는 진리만이 영원한 법인가.


언젠가는 잊히고 사라질 가게를 생각하다가 어쩌다 보니 삶의 유한함까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었다. ‘나 또한 언젠가는 절멸할 인간.’ 괜히 우울한 마음이 치솟는다.

조금 더 밝은 생각들을 떠올려야 한다. 그래, 누군가 그랬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 소중한 날들을 보낼 수 있는 거라고. 끝이 있음을 알기에 더 값진 거라고. 모두에게 평등한 유한한 삶을 알차게 꾸려가는 건 각자의 몫이라고.

완벽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그렇게 보면,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찾아 소중한 한 끼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더 멋지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사라질 나 또한 내 일상을 소중히 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언젠가는 변질되고 바뀌어갈지도 모르지만 현재의 생각들을 소중히 추억하기 위해서.

바뀌고, 사라지고, 절멸하는 게,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언젠간 호프집 맹물에 꼭 들려봐야겠다. 나만큼은 특별한 마음으로 이 가게를 추억해 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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