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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Sep 30. 2023

추석엔 이모가 된다.

명절 기피 질문 등장이요.



추석 연휴가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조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도착한 본가에는 이미 전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모~~~"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반겨주는 아이들을 보니 '이것이 아이들이 있는 집의 텐션?!'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채 하기도 전에 놀이터에 가자며 보채는 아이들 성화에 조카 두 명을 데리고 서둘러 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야무지게 물병도 챙겨 온 걸 보니, 금세 들어갈 생각은 아닌 모양.


호기롭게 '놀이터에서 놀아주는 것 정도야!' 하고 자신만만했지만, 두 아이를 돌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직 낮에는 햇빛이 뜨거워 땀을 흘리는 아이들에게 중간중간 물도 먹여야 했고, 사진도 찍어주고, 좌측으로 가는 아이와 우측으로 가는 아이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유인 작전도 해줘야 하고, 단순히 미끄럼 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어린이를 위한 미션도 내줘야 하고 응원도 해줘야 한다. 게다가 다리가 아픈 녀석은 안아줘야 했고,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틀어줘야 했고, 또 이번에는 두 손이 아닌 한 손으로 안아줘야 했다.


아이들은 지치지 않는 것일까?

무려 세 군데의 놀이터를 투어 한 후에 우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 손으로 안을 수는 없었지만 둘째는 내가 양손으로 감싸 안으니 다소 피곤했는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온다. 동생이 지치기를 기다렸는지 첫째 '유럽'이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건다.


"이모, 있잖아요."

"응"

"이모는 결혼 안 해요?"

 맙소사. 엄마 아빠도 하지 않는 질문을 조카를 통해 받게 되다니. 훅 들어온 질문에 놀라고 말았다. 혹시 녀석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주를 받은 것인지 잠깐 고민했지만, 어느덧 어린이 티를 내며 저학년과 고학년의 경계에 있는 첫째는 궁금한 게 많은 나이 같기도 했다.


"안 할 것 같은데에~"

"왜요? 결혼을 하면은요. 돈도 더 많아져요."

"이모는 지금 혼자여도 돈을 많이 번단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회유를(?) 하기 시작하는 유럽이.


"아니이, 그게 아니구요. 결혼을 하면은요. 외롭지가 않잖아요."

"이모는 지금도 외롭지 않은데? 그리고 외로우면 친구를 만나면 되고."

"그게 아니라, 매일매일 만날 사람이 생기잖아요."

"혼자 있는 게 더 좋으면 어쩌지? 나가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어떻게 안 외로울 수가 있어요!"

유럽이에게 결혼과 관련한 다양한 가치관을 쌓아줘야 하나 고민을 하는 틈에 유럽이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썽을 낼 것 같아 더 약 올리기를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럼, 이모가 결혼하고 싶을 때가 되면 해야겠다!"

"알겠어요."

내가 한 발 물러나자 유럽이도 한 발 물러났다.

드디어 맺은 평화협정.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가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는 것이다. (훗.)


어느새 이렇게 커서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까.

어렸을 때에는 "네가 피넛이니?! 아이고, 언제 이렇게 컸어?!" 하고 놀라는 이모, 삼촌들의 말이 지겹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조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어느새인가 "아니?! 너네 왜 이렇게 커졌어?!" 하고 똑같이 놀라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아이들의 시간은 정말 빠르다.  


갑자기 이모가 결혼을 할지 말지가 왜 궁금해진 것인지,

왜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던 것인지,

유럽이는 결혼이 하고 싶은지,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둘째를 안고 있는 팔이 점점 후들거리기 시작해서 길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깊은 대화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나의 머릿속은 어서 빨리 집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꽉 차버리고 말았다.


집에 도착해 손을 씻고 엄마 아빠의 침대에 누워 쉬고 있으니 작은 녀석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짜식, 너도 피곤했구나. 유럽이는 아직도 활기 넘치게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폼새가 '어디 뭐 재밌는 일 없나~' 하고 살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놀고도 아직 체력이 남았다니. 무적 초딩인 유럽이.


어느덧 '결혼'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될 만큼 커버린 유럽이.

하지만 아직도 놀이터가 좋은 유럽이.

세상에 궁금한 게 너무 많은 유럽이.

가끔 보면 훌쩍 커져있는데,

또 놀이터에서의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모르겠는 유럽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

잠시마나 아이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물론 365일은 자신이 없다.)


이 시간들이 나중에 어떻게 기억될까.

추석엔 이모를 만나고, 이모는 열심히(?) 놀아줬고, 엄마랑은 할 수 없는(유럽이 엄마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상세히까지 아니어도 하하하 웃으면서 귀가했던 그 길을, 담소를 나누던 그 시간이 유럽이의 마음속 어딘가에 한 조각 따뜻하게 남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날 내 모든 체력을 소진했으니까.... 그렇게라도 남아주기를.....(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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