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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Nov 12. 2023

먹고 기록하고 사색하라

먹고 기록하면 사람되나

급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고 중무장을 한 채로 산책에 나섰다. 나의 산책 메이트 길동이도 추운지 코드를 여미며 옆에서 걷고 있다.


"나,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 엄청난 거야!"

내가 떠오른 생각이 휘발될 새라 급하게 말했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말이 뭘까 생각해 봤는데, 바로 이거야! '먹고, 기록하고, 사색하라!" 어때?"

길동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 영화 좋아하는 거 알지? 줄리아로버츠 주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그 영화 말이야. 좋아해서 여러 번 봤거든. 줄리아로버츠가 먹으러 이탈리아에 가고, 기도하러 인도 가고, 사랑하러 발리 가는 그거 말이야. 그 영화를 떠올리면서 생각해 봤어. 어때?"


"아, 그 영화."

이제야 알아듣는 건가.

"영화 보다 자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는데."

이 자식이.


내가 눈썹을 올리며 한 소리 하려고 하자 길동이가 다급하게 말을 잇는다.

"먹고 기록하고 사색하라 말고 이런 건 어때?"

날 옆에서 지켜봐 온 길동이가 말해주는 것이라면 조금 더 흥미로운 캐치프레이즈가 나올지도 모른다. 살짝 기대하며 어서 말해보라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먹: 먹고

기: 기록하면

사: 사람 되냐?


나는 결국 길동이의 등짝을 팍! 하고 때려주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어. 더 좋은 게 나오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두 대다! 자, 다시!"


먹: 먹고

기: 기냥(?) 자면

사: 사....살쪄요.


두 대를 맞은 길동이. 추운 날씨지만 열이 후끈 올라버렸다. 한 번 더 해보겠다며 기회를 요구한다.


먹: 먹고

기: 기다렸다가

사: 사장님, 여기 이인분 추가요~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나는 "재치 점수 1점 드립니다."하고 말해버렸다. 나의 인생을 꿰뚫는 더 멋진 캐치프레이즈는 나오지 않았지만 덕분에 즐거운 산책길이 되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앉아 '먹고, 기록하고, 사색하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이지 요즘 내 일상을 잘 표현한 말인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것을 먹고, 기록을 남기고 추억으로 사색하는 그런 일상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오는 줄리아로버츠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과감하게 홀로 여행을 떠난다. '진정한 자신'이라는 말은 내가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진정 나 다운게 뭔데?!' 하고 반기를 들게 되면서도 '나도 나다운 걸 찾고 싶어' 하는 부러운 심정이 들고 만다.

줄리아로버츠는 열심히 먹고, 기도한 끝에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지만, 나는 아직까지 '진정한' 나의 모습이 뭔지, '진실된' 행복이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뭐든 자꾸 기록하다 보면 찾을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글과 그림을 남기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더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기억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좋은 취미가 아닐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밥! 죽밥! 죽밥!) 계속해서 먹고, 기록하고, 사색할 테다.


길동이가 한 말처럼, 먹고, 기록하다 보면, (진정한)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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