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넛 Oct 30. 2023

정말 밤맛이야

성숙의 맛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다.


채혈, 초음파, 골다공증 확인을 위한 골밀도 검사까지 다양한 검사를 한 번에 하기 때문에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병원 신세다.

아침부터 대기와 검사를 진행하느라 다소 지친 몸과 정신.


그래도 보험사에 제출할 서류를 뽑아야 이 긴 과정이 끝난다.

원무과에 방문해 대기번호를 뽑고 나니 내 앞에 30명이 있다. 그래, 이 정도면 버틸 만 하지. 병원 검진은 놀이공원의 대기줄을 뺨친다는 것을,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병원에 와보지 않고는 모른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내 순서가 왔다.

보험사에 제출할 서류를 받은 후 대기석으로 돌아가 모든 서류가 출력되었는지 확인해 보니 서류 하나가 빈다. 다행히 나를 담당했던 직원분은 통화를 하느라 아직 대기번호가 넘어가지 않았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빠르게 직원분 앞으로 가서 서있었는데…


그 순간 내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큰 소리를 치셨다. 깜짝 놀랐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에게 소리친 것이 분명했다. 당황했지만 내가 새치기를 했다고 오해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방금 서류받아갔는데 하나가 안 나와서요. “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고성을 멈추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며, 자리를 비켜줘야 하나 아니면 더 큰 소리로 오해를 풀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옆 창구에 있던 직원분이 할아버지께 “제가 도와드릴게요.”하며 진정을 시켰다. 그 사이 내 앞의 직원분도 통화를 마치고 내 서류를 다시 뽑아주셨다.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으로 조제약을 받으러 약국으로 향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대학병원이라 근처에 약국이 엄청 많았다. 평소에 가던 약국이 있지만 오늘은 약간 넋이 나갔기 때문에, 빠르게 집으로 가고픈 마음에 버스 정류장 근처의 약국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약국에서 나는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약국 카운터에 이런 메모장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천천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약사도 사람이라 실수할 수 있습니다.
차분하게 말씀하시면 오류를 정정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정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어느 정도 약사님의 고충이 느껴지는 메모였다.

그랬다. 병원 근처에는 아픈 사람이 많고, 아픈 사람들은 예민할 수밖에 없다. 예민함이 어떻게든 표출되었을 것이다. 아픔 몸은 마음도 병들게 만든다.


나에게 소리를 치던 할아버지와,

그 모습에 나 또한 맞불 작전으로 소리치려고 생각했던 나.

둘 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레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런 점에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은 보다 더 성숙한 측면이 있다.

며칠 전 카페에서 나눴던 동생과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최근 동생의 관심사는 조카의 영어공부인데,

해외에 사는 친구의 어린 자녀가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보고 질투가 일었다고 한다.

“네가 요즘 관심 있는 분야인데, 앞서나간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 아니 뭐, 해외살이는 못해도 해외여행이라도 보내야 하나, 하하하!” 하고 내가 가벼운 위로의 말을 건네자 동생이 말했다.

“거기서 질투하는 마음이 생겨버린 나에게 실망이 드는 거야. 그런 마음을 품어버린 게.”

이럴 수가. 질투하는 그 마음을 반성하는 자세라니.

멋진 어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오늘 들른 카페는 스타벅스로, 기프티콘을 쓰기 위해 들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스벅 기프티콘은 케이크와 커피 두 잔이 가능한 메뉴 구성.

점심을 잔뜩 먹어 배는 불렀지만 어쩔 수 없이(?) 케이크를 시켜야 한다.

평소에 좋아하던 카스테라를 먹을까, 신메뉴를 먹어볼까 고민하고 있으니

”언니, 요즘 밤 시즌이니까, 밤 케이크 먹어보자. “

하고 동생이 제안을 해온다.

나는 밤 맛이 나는 디저트는 바밤바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편견이 있어 다소 우려스러웠지만, 가을 시즌에만 먹을 수 있는 데다 후기가 좋다는 얘기에 결국 밤 케이크를 주문했다.



밤 케이크는 우려와 다르게 고소하고 달달하고 은근한 상큼함이 있어서 맛있었다.

모든 밤 맛 디저트는 바밤바 맛일 것이라는 나의 편견을 깨 주는 맛이었다.


케이크 위에 올라간 밤 알갱이 하나를 보며 동생이 말했다.

“언니, 이거 밤은 언니가 먹어봐. 나는 집에서 보늬밤 만들어둔 게 잔뜩 있어서.”


이렇게 어른스러울 수가!

단 하나 올려진 밤을 양보해 주는 동생에게서 언니의 향기가 풍기는 듯했다.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반성하고 뉘우치고,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단 하나 있는 밤을 나눠줄 수 있는 배려와 아량을 가진 사람.

나이와 관계없이 어른이었다.


입 안 가득 커다란 알밤을 씹으니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올라온다.

“야, 이거 진짜! 맛있는 밤 맛이다!”

우리는 둘 다 웃음이 터졌다.


이 밤 맛은, 성숙한 어른의 맛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먹고 기록하고 사색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