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존중할 수 있는 것
아이를 낳기 전엔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람 하나가 내 하루의 모든 것이 되고,
그 존재 하나가 내 감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걸.
육아는 단순히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다시 자라나는 과정이었다.
워킹맘 시절의 나는
규칙과 통제로 아이를 양육하려 했다.
그게 ‘가족의 조화’를 위한 최선이라 믿었고,
움직이는 시간표 안에 아이를 맞춰 넣으려 했다.
“너는 아기니까 어른의 시간에 맞춰야 해.”
그 말로 아이를 설득했고,
잠이 오지 않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지쳐 잠들길 바랐고,
결국 그 작은 몸이 침대를 타고 넘어와
문을 열고 내게 걸어왔다.
그 순간, 머리를 세게 맞은 듯했다.
내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 후로 자기 주도수면을 그만뒀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같이 누워
노래를 부르고 토닥이며 잠들었다.
그때부터 아이는 달라졌고,
나 역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휴직 후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지내며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이가 내 뜻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건
오로지 내 이기심이라는 걸.
아이 돌 전까지의 나는
‘육아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유식, 발달표, 수면패턴…
조금만 느슨해져도 아이가 뒤처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아이는 그저,
내가 웃으면 웃고, 내가 힘들면 울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나를 비추는 일이라는 걸.
사랑에 대해 글을 쓸 때 ‘미러링’이라는 말을 썼었다.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타인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건 ‘나를 투영하는 것’이었다.
내가 불안하면 아이도 흔들리고,
내가 평온하면 아이도 안정됐다.
아이는 나의 감정 온도를 그대로 품은 존재였다.
‘통제’와 ‘사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엄마는 종종 사랑을 통제라고 착각한다.
나 또한 그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
아이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날엔
짜증이 올라오고,
화가 나지만 결국 깨닫는다.
이 아이는 내가 조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람이라는 걸.
아이를 키우며 나는 ‘사랑’을 다시 배웠다.
사랑은 말과행동이 아닌 함께하는 시간이었고,
함께 있다는 건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비춰주는 존재의 그 자체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아이의 손을 잡고 웃을 때면
“아, 이게 살아 있는 순간이구나.” 싶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는 나의 완벽함보다
나의 온기와 감정을 기억할 테니까.
이제 나는 ‘좋은 엄마’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길을 비춰주는 사람이
바로 내 아이임을 안다.
결국 ‘통제’와 ‘사랑’의 줄다리기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는 건,
엄마 아닌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