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가 세다는 건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
대만 워킹을 마치고 돌아와 전 직장에 다시 간 건 판단 미스였다. 중국어로 밥벌이하겠다는데 다짜고짜 토익 스피킹을 따서 중국인에게 영어를 쓰라니? 미련 없이 때려치우고 다시 대만행을 결심했다. "이번에 가면 연 끊자"는 부모님께 "그럼 호적에서 파라"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시전 하며 그렇게 다시 대만으로 떠났다. 이번의 밥벌이는 친구가 추천해 준 현지 가이드였다.
가이드의 진짜 실력은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침착함에서 나온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을 한 차에 태우고 같은 목적지를 다니는 여행에서 돌발상황은 필연적이다. 그때 가이드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여행객의 기분과 여행의 질이 통째로 바뀐다.
보통 영업은 기가 센 사람이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다.
진짜 영업을 잘하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와 그릇이 넓어서 어떤 말을 들어도 동요하지 않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가이드는 '길바닥 위의 영업'이다. 무방비 상태인 상대의 마음을 파고드는 기술, 그게 핵심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투어만 믿고 온 손님들에게 가이드는 이곳의 모든 것을 아는 '통'이자 리더다. 여기서 영업의 꽃은 역시 여행 막바지의 '쇼핑'이다. 모든 가이드는 자신만의 '킬링 포인트(킬포)'가 있다. 이건 남을 따라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각자의 매력에 맞춰 만들어져야 한다.
말투, 생김새, 행동이 다 다른데 기술만 따라 한다고 성공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어떤 캐릭터인지부터 공부했다. '키 작고 어려 보이는 젊은 아가씨'인 내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면 일단 똑똑해 보여야 했다. 이 일을 할 만한 충분한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었다.
전략은 확실했다. 강강약약. 강하게 나오는 손님에겐 더 강하게 밀어붙였고, 상대가 당황하면 살짝 꼬리를 내렸다.
손님: "아니, 아가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예? 밥이 이게 뭐야! 내가 낸 돈이 얼마인데!"
나: "아버님! 이거 식당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여행 상품 계약하실 때 식당 이름이랑 메뉴까지 다 설명드려요. 자세히 못 들으셨나 보네. (옆으로 다가가 소곤거리며) 근데 아버님, 다른 분들 맛있게 드시는데 아버님 이러시면 다 같이 맛없어져요. 제가 나중에 따로 커피 한잔 사드릴게요. 호호~"
다 같이 있는 곳에서 큰소리 내면 똑같이 받아친다. 그러고 나서 당사자에게만 들리게 슬쩍 애교를 부린다. 이게 가장 쉽고 빠르게 진상을 잠재우는 방법이다. 여기서 가이드가 기에 눌려 깨갱하면, 조용히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호구되기 싫어서" 같이 난리를 치게 된다.
영업에는 '초심자의 행운'이 반드시 존재한다. 어설퍼도 열심히 하려는 그 마음이 손님에게 닿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지갑을 연다. 하지만 이 행운은 딱 한 달이면 끝난다. 일정이 익숙해지고 사람 대하는 게 능숙해지면 그 진심은 싹 사라지고, 건조하게 일을 하는 '기술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무방비 상태의 고객에게 진심을 다한 맞춤형 서비스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선배의 기술이 다 정답은 아니다: "저 정말 어려우니까 도와주세요 ㅠㅠ" 같은 동정 유발 작전은 나와 전혀 맞지 않았다. 누가 봐도 없어 보이지 않았던 내가 하기엔 역효과만 났다. 솔직함이 항상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다.
성희롱 퇴치법: 아버지뻘이면 "저희 아버지는 제가 이렇게 돈 버는 걸 아실까요?"라며 감정에 호소했고,
삼촌뻘이면 아무 말 없이 눈을 5초간 응시해 무안을 줬다.(패키지는 대부분 가족여행이기에 이 방법이 먹혔다)
아저씨들만 올 땐? 그냥 같이 막 나갔다. 선을 안 넘게 만드는 게 기술이다.
가장 힘든 컴플레인: 앞에서는 "가이드 최고!"라며 웃던 손님이 뒤에서 칼을 꽂을 때다. 이런 배신을 몇 번 겪고 나니, 오히려 너무 좋아해 주는 분들을 더 세심히 살피는 노련함이 생겼다.
가이드는 딱 5일만 참으면 된다. 어차피 다신 안 볼 사람이라는 장점도 있고, 애프터서비스도 없다(물론 '노란 딱지' 컴플레인은 무섭지만!).
사무직, 통번역, 해외영업, 유튜버... 참 많은 일을 해봤지만 나에게 가장 잘 맞고 즐거웠던 직업은 단연 가이드였다. 길바닥 위에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만큼 짜릿한 밥벌이가 또 있을까.
*패키지 가이드의 다양한 썰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연재로 가보실까요오?
https://brunch.co.kr/brunchbook/tourguidestory
연재를 시작해 두고 다음 글이 자꾸 늦어지게 되어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저 자신과의 약속을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미뤄본 적은 처음이라, 사실 뭐라 운을 떼야할지 몰라 슬쩍 모른 척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떤 거창한 핑계보다도, 요즘 제 마음이 조금 혼란스러웠던 탓에 일상을 간신히 유지하며 지내온 게으름이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독서와 글쓰기로 정진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합니다.
다음 편은 다음 주 중으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여 제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신다면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무엇보다 가정과 마음속에 깊은 평화가 깃드는 나날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재밌는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