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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May 09. 2023

카랑코에와 방울토마토

-사랑과 관심이 필요해요.

카랑코에라고 아시나요?     


작년에 카랑코에 화분 다섯 개를 샀었습니다. 집안을 둘러보니 너무 휑해 보이던 차에 한 인터넷쇼핑몰에서 우연히 오밀조밀한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는 사진을 발견했고, 더군다나 가격도 저렴해서 망설일 이유 없이 바로 구매했습니다. 그동안 집안이 삭막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분 하나 두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잘 자라던 식물들이 저에게만 오면 시들시들 생을 마감하더라고요. 난초, 고무나무, 행운목, 산세베리아 심지어는 사막에서도 끄떡없이 자란다는 선인장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집안에 어떤 식물도 두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 ‘귀찮다’

- ‘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죽을 것 같다.’였습니다.

      

시골 엄마 집에 가면 예쁜 꽃 화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찌 보면 귀찮은 게 이유가 아니라,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죽게 한다는 나름의 죄책감이라고 해도 맞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한두 번이야 ‘뭐야? 또 죽었어?’ 했지만 자꾸 그렇게 나에게 왔던 식물들이 말라가니 ‘나는 이런 걸 키우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쁜 꽃을 곁에 두고 즐기고 싶어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식물을 기르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학습도 하고 있고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퀴즈로 물어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학부모님들은 아실 것 같습니다.

[ 식물의 한 살이 ]라는 단원을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을 거예요. 그 단원에서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한 조건이 나옵니다.

1. 적당한 양의 물

2. 적당한 온도 

3. 충분한 햇빛     


여기서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난감해할 단어들-적당한, 충분한 이런 말들이 있긴 합니다. 이는 마치 손맛 좋으신 어머니들이 계량하지 않고, ‘적당히’, 내지는 ‘요만큼’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뭐가 이상해진다거나 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식물이 잘 자라는 요건은 충분히 알고 있으며, 다육이들처럼 물을 자주 줄 필요도 없다고 하니 저처럼 귀찮은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 키우기에는 제격인 것이 맞습니다.     






다음날 서로 다른 색의 꽃이 피어있는 카랑코에 화분 다섯 개가 도착했습니다. 잘 키워 보겠다고 마음먹고 다이소로 향했고, 호기롭게 옮겨 심을 때 필요한 분갈이용 흙과 예쁜 화분도 개수를 맞춰 구매하여 집으로 왔습니다.          

일단 베란다 바닥에 신문을 깔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분갈이를 했습니다. 한동안 정말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키우기 쉬운데 예쁘기까지 하니, 영화 제목 같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요? 물론 카랑코에 꽃은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간 것 같습니다만, 영원히 그 상태로 피어있지는 않더라고요. 조금씩 꽃이 말라서 떨어지고 바닥은 또 그렇게 떨어진 꽃으로 지저분해지고, 그러다 보니 [귀차니즘]이 발동하게 되면서 ‘내가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너무나도 오밀조밀 예뻐서 감탄까지 했었는데, 꽃이 지고 나니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꽃이 떨어진, 보기 흉한 꽃대를 잘라주고 흙이 마른 듯하면 충분한 양의 물도 주고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하게도 다시 꽃대가 올라오고 꽃이 피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카랑코에 화분을 주문했을 때 방울토마토 씨앗 화분 하나가 사은품으로 왔었습니다. 종이상자를 접어서 화분을 만들고, 동봉된 흙을 넣고 씨앗을 심어주면 되니 아주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모종을 심은 것이 아니고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드디어 싹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총 다섯 개의 씨앗을 심었지만 모두 싹을 틔우지는 않았습니다. 그중에서 실하게 줄기가 올라오는 녀석 두 개 골라 다시 다른 화분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그렇게 흙이 마른 것 같으면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주면서 나름 애지중지하며 보살펴 주었습니다.

토마토 화분은 생각보다 빠르게 자랐고, 베란다 한쪽에서 드디어 토마토 잎사귀를 슬쩍 건드릴 때면 토마토 특유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나의 관심은 카랑코에가 아니라 토마토 화분으로 기울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 때 나의 눈에 더 띄고 이쁜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레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거든요. 마음에 한 사람만 둘 수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그러니 결혼을 한 사람이나 또 연애 중인 사람이 한눈을 팔거나 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이 변한 것이든 이도 저도 다 좋은 것이든 무엇인가 더 새로운 자극에 고개가 돌아가고 관심을 두는 것은 어찌 보면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토마토 화분은 그렇게 나의 사랑과 관심 속에 무럭무럭 자랐고, 드디어 노란색 꽃이 피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꽃이 피어서 한 가지 당 하나의 꽃만 남기고 나머지 꽃들은 모두 따주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니, 꽃이 떨어진 자리에 정말 눈물 한 방울도 안 될 크기의, 너무나도 귀여운 토마토가 열렸고, 너무나도 신기한 나머지 매일매일 아침마다 안부 인사하듯 바라보며 애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나의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듯 그렇게 방울토마토는 점점 실하게 커갔고, 부끄럽기라도 한 듯 조금씩 빨갛게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이뻐. 하며 감탄했고, 

드디어 갓 시집온 새색시가 부끄러움에 새빨갛게 붉힌 얼굴처럼 익었을 때 하나씩 따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애지중지 키운 토마토라 그런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토마토라며, 마치 전교 일 등 한 자식 자랑하듯 주변에 자랑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쯤 되니 카랑코에 화분은 나의 관심 밖으로 아예 밀려난 신세가 되었습니다. 밀려난 정도가 아니라 이쁘지도 않은 것이 자리만 차지한다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변덕이 끝이 없다고, 그렇게 오밀조밀 이쁘다고 감탄하기까지 해 놓고 이제 와 맘이 변했다고 원망해도 이미 변해버린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내 마음은 너에게서 떠났다. 


- 그러게 내 마음이 너에게 있을 때 잘했어야지. 하지만 이 말은 조금 어이가 없긴 합니다. 관심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조금 더 분발해서 예쁘게 꽃을 피우고, 물을 조금 덜 주더라고 잘 참았어야 한다는 말이 되니 말입니다.      




     

카랑코에와 방울토마토 화분의 차이가 뭘까요?


같은 사람이 키우고, 필요한 만큼씩만 물을 주었고, 충분히 햇볕도 쬐어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는 주인을 만족시켰고, 다른 하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일까요?     

사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나는, 웬만한 농작물들은 갓 귀농한 농부 지망생들보다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부모님 곁에서 보고 자란 것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지인들과 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갈 때면 "저기 감자밭이네.", 라든가 고구마 줄기나 당근잎을 보고 아는 체를 할라치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놀라곤 했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감자 고구마 당근 양배추가 어떻게 자라고 그들이 어떤 잎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울토마토는 나에게 익숙한 식물이었고, 카랑코에는 그저 이쁘다는 생각만으로 덜컥 샀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방치해 두고 점점 말라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 내가 조금이라도 카랑코에 화분에 관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물을 주고 어떻게 키우면 잘 자라며, 가지를 치는 방법은 어떠한지 좀 더 잘 알아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스치듯 알고 있던 조금의 지식으로 그저 대충대충 키워보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노력으로도 방울토마토는 잘 자랐는데 너는 왜 그러냐고 미움을 샀던 것입니다. 나의 무관심과 미움을 받으며, 카랑코에 화분은 그렇게 혼자 힘겹게 버티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다섯 개의 화분 중 일부는 지금은 생을 다하였거나,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처럼 통통한 잎이 아니라, 마치 늦가을에 겨울을 맞기 위해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잎사귀처럼 말라 있습니다. 


- 나는 또 그렇게 죄를 지었구나... 싶었습니다. 애초 사지를 말든가, 샀으면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키웠으면 좋았을 것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노력을 들인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결과를 내지는 못합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 이상의 것을 배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같은 곱셈 나눗셈을 설명을 해도 난생처음 대하듯 낯을 가리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카랑코에 화분을 대하듯 


- "내가 똑같은 노력으로 설명을 해주었는데, 너는 왜 모르니?" 


라고  그 학생을 한심한 아이 취급을 하면 될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요즘 4학년 친구들의 수학을 보면서, 아! 이래서 점점 수학을 포기하려는 친구들이 생기나 보다 싶습니다. 3학년 2학기때보다 겨우 한자리 늘었다고 말을 하지만, 세 자리 곱하기 두 자리 곱셈이 전혀 안 되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곱셈도 이러한데 세 자리 나누기 두 자리는 아예 엄두도 못 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가 카랑코에 화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같은 노력을 들여 강의를 듣고 문제를 푸는데 왜 너는 이해를 못 하냐고 다그치듯 아이를 대하고, 한심하다는 투의 말을 뱉는 순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며 그 아이는 수학이라는 과목과 점점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화분이 잘 자라지 않으면 뭐가 문제인지를 살펴보고, 잘못된 부분을 해결해 주면 되는데 굳이 방울토마토화분과 비교해 가며, 너는 왜 그러냐고 다그칠 일이 아닙니다. 작은 식물들도 그런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문제 푸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웬만한 어른들 눈에는 그 아이가 곱셈 나눗셈이 안 되는 이유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는 푸는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경우도 있었고, 어떤 아이는 단순 자릿수를 잘못 맞춰서 계산이 잘못된 경우, 또 단순 덧셈실수인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안 되는 부분을 설명해 주면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데, 그게 안되니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고 안 되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부모님들은 또 그 나름대로 괴로운 일이 된 것입니다.

간혹 어떤 어머님들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리 배울 때랑 풀이 방식이 달라서 설명을 해주기가 어렵다. 과연 그럴까요? 간혹 어떤 단원에서는 예전보다는 다양한 풀이 방법을 알려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곱셉 나눗셈을 푸는 방식이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곱셈은 곱셈이고 나눗셈은 나눗셈. 예전에 풀던 방식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주면 달라질 수 있는데 혹시 그 노력이 귀찮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점심때마다 매일 30분씩 산책을 합니다.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복잡한 일들을 정리하는 일종의 루틴 같은 거라고 해도 맞을 겁니다. 매일 음악을 선정하고, 카페에 들러 그날의 날씨에 맞는 hot 또는 ice  아메리카노를 들고 그렇게 30분씩을 걷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우연히 도로변에 트럭을 세워두시고 여러 가지 꽃화분을 파는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길옆 인도에 여러 가지 화분을 전시해 두고 지나가는 분들에게 하나씩 사라고, 혹은 구경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휙~둘러보는 내 눈에 순간 들어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카랑코에 화분.     

순간 마음속에서 

-‘이쁘다.’ 하는 무책임한 생각이 꿈틀대고 있었고,      

순간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잘 키울 자신이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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