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카와 발렌시아
바르셀로나 여행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를 계획하던 중 마요르카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의 약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섬으로 바르셀로나나 발렌시아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어서 유럽인들에게는 대표적인 휴양지이자 별장과 세컨드 하우스가 많은 지역이다.
마요르카의 남서쪽에는 이비자(Ibiza)라는 매년 엄청난 규모의 파티와 공연들이 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섬이 있는데 모두다 가볼수가 없어서 마요르카로 정했다. 사실 이비자는 내향인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차보였다.
한국에 있을 때 사진작가 요시고(Yosigo) 전시회를 본 적이 있었는데 마요르카의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유명해서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게 되었다. 우리의 차가 문제였는데 마요르카를 다녀올 4박 5일 동안 바르셀로나의 공항에 주차를 해놓기로 했다.
마요르카 여행을 마치고 포르투갈로 향하는 중에 스페인 남부지방을 쭉 돌고 싶었는데 이러다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시간을 다 보낼 것만 같았다.
쉥겐 90일은 너무 짧다.
동선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꼭 가보고 싶었던 발렌시아와 그라나다, 세비야에서 머무르며 근처 관광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2024년 8월 초부터 중순까지의 스페인 여행 두 번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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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 및 일정
바르셀로나에서 마요르카로 비행기를 타고 왕복했다. 마요르카에서 가장 큰 도시 팔마까지는 비행기로 약 45분 정도 걸린다. 우리는 4박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쪽지역과 남부지역 일부만 돌아보았다. 바다수영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마요르카는 정말 천국이다. 좋은 날씨에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 맛있는 스페인 음식까지 완벽했다.
발렌시아에서는 목적이 정해져 있어서 1박만 하고 다음 도시인 그라나다로 이동했다.
마요르카 (Mallorca)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마요르카는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에서 갈 수 있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남아있어서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왕복하기로 했다.
비행기로는 약 한 45분 걸리고 페리로는 4~5시간 걸린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마요르카 섬의 수도 팔마로 이동했다.
섬의 여러 곳을 다니고 싶어서 공항에서 렌트카를 빌렸다. 제일 저렴한 내연기관 차를 예약했는데 반납 시 기름을 채워 반납하는 금액까지 더하면 전기차가 더 저렴해서 스웨덴 전기차 폴스타를 빌렸다.
팔마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ía de Palma
1601년에 팔마 해안가에 지어진 마요르카 섬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거대한 성당이다. 1900년대 초에 가우디가 리모델링에 일부 참여 했다가 급진적인 설계에 대한 반감을 사서 끝까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바르셀로나로 돌아간 가우디는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 매진했다고 하니 한편으론 더 잘된 일인가도 싶다.
팔마 구시가지를 거닐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장면이 있었다. 중세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 안에, 만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 단순한 선과 색으로 그려진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걷고 있었다.
런던 출신 현대 팝아티스트 줄리안 오피(Julian Opie)의 작품이었다. 흑백의 굵은 윤곽선, 파란색의 단순한 채색, 군더더기 없이 잘라낸 전신 실루엣. 멀리서 보면 교통 표지판 같은 그림 같기도 했고, 가까이 다가가면 실제 사람만큼 커다란 조형물이라 묘한 존재감을 풍겼다.
구시가지에는 오래된 해시계와 현대미술작품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팔마 시청과 발레아레스 정부가 공공 공간에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고 하는데 광장, 해안 산책로, 성벽 주변 등에 작품들을 배치해서, 시민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을 접하게 만들었다.
또한 마요르카는 오래전부터 유럽 예술가들이 휴양 겸 작업을 위해 찾아온 곳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공간이 되었고 도시 전체가 예술 친화적인 분위기를 유지해 와서 산책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
바이데 모사 (Valldemossa)
팔마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진 바이데모사에 왔다. 돌담 집들과 테라코타 지붕이 층층이 이어진 전형적인 지중해 산간 마을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작은 마을 골목에는 차들이 다닐 수 없어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 다니기로 했다. 작은 골목마다 갤러리, 공방, 기념품 가게, 카페가 있고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지중해와 올리브·아몬드 밭 풍경이 아름다워서 사진 명소로도 유명해진 곳이다.
바이데모사는 화려한 관광지라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천천히 걷고, 풍경과 공기, 음악과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마을이었다. 여행을 하며 그냥 스쳐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곳이었다.
소예르 (Sóller)
바이데 모사와 함께 마요르카 섬 북쪽 여행을 하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인근 포르트 데 소예르(Port de Sóller) 해변에 주차를 하고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해변을 거닐었다. 반달 모양의 해변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카페 몇 곳을 돌아다녔는데 겨우 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고 해변을 거닐다가 충격을 받았다. 누드비치가 아닌 그냥 해변이었는데도 남녀의 옷차림이 다르지 않다. 그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중에는 그냥 많이 더운가 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몸은 몸일 뿐인데 아직 유럽여행 초반이라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소예르의 명물인 트램을 타고 마을로 향했다. 오래된 트램은 소예르 여행의 백미다. 느릿하게 덜컹거리며 달리는 전차에 몸을 싣고, 좁은 골목과 오렌지밭을 지나 마을 광장으로 간다. 소예르는 오렌지가 많아서 오렌지 계곡이라고도 불린다.
베트남 하노이에서도 마을을 관통하는 기차를 구경했었는데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마을 중심의 소예르 광장(Plaza de la Constitución)은 활기로 가득했다. 카페테라스에 앉아 수다 떨며,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트램을 구경만 해도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내가 상상했던 유럽감성 그대로였다.
Cala s’Almunia (칼라 사 알무니아)
팔마에서 약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Portocolom(포르토콜롬)라는 마을에 왔다. 남동쪽 해안에 있는 아주 오래된 어촌 마을이다. 마요르카에서 숙소를 한 번 옮겼는데 팔마에서 2박 하고 포르토콜롬에서 2박을 했다.
마요르카 남쪽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아주 많은데 그중에서도 Caló des Moro와 Cala s’Almunia가 유명하다. 해변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십 분 정도 걸어가면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좁은 계단을 따라 절벽을 내려가면 파란 바다가 나타난다. 누워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절벽에서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풍경이 되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해변이라 평평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 울퉁불퉁한 곳에 돗자리를 폈다.
그동안 여러 나라의 많은 바다에 뛰어들어 봤지만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곳이었다. 딱 적당한 햇살과 파란 하늘, 투명한 바다, 그리고 분위기 때문인 거 같다. 너무 시끌벅적하지도 않고, 귀찮게 하는 잡상인도 없고 서로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그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준거 같다.
유난히 하늘을 바라보고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스페인 사진작가 요시고가 이곳 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따라서 연출하는 관광객들이었다. 분명 피부가 다 탈 정도의 강한 햇빛이었는데 물속에 있어서 그런지 포근함을 느끼며 둥둥 떠 있던 순간을 지금도 가끔씩 떠올린다.
발렌시아 (Valencia)
마요르카 여행을 마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도 보고 꿀대구도 먹고 미처 못한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90일 중 벌써 2주일이나 지났다. 서둘러 발렌시아로 출발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숙소 바로 앞에 커다란 경기장이 있었다. 발렌시아 CF구장 바로 앞의 숙소였다. 마요르카부터 발렌시아까지, 의도하지 않았는데 마치 이강인선수의 발자취를 따라온 것만 같은 동선이다.
우리가 발렌시아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에 왔다. 하얗고 거대한 구조물. 바로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의 고향이 발렌시아다.
이곳에는 예술과 과학의 도시 (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라는 칼라트라바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이자 도시의 상징 같은 공간이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착공하여 마지막 건물이 2009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좁은 골목길과 주차장 때문에 고생했는데 모처럼 넓디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처음에는 과학박물관이라고 해서 건물하나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여러 건물이 순차적으로 지어진 거대한 복합 단지였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지상층으로 내려오니 아치형 기둥들이 반복적으로 세워져 받치고 있다. 규칙을 가진 반복은 참 사진이 잘 나오는 것 같다. 칼라트라바를 쫓아서 세계여행을 하는 것처럼 유독 브런치 글에 많이 언급하는 것도 잘 나온 사진들이 많아서이다.
원래 이곳은 발렌시아 도심을 가로지르던 투리아 강(Río Turia)이 원래 흘렀던 자리이다. 1957년에 대홍수(Gran Riada de Valencia)로 도시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강을 도시 외곽으로 우회시키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하여 남게 된 옛 강바닥 자리에 공원과 문화시설, 스포츠 시설을 설치하여 발렌시아의 대표 관광지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뉴욕에서 봤던 오큘러스가 처음 예상했던 20억 달러의 약 두 배인 40억 달러가 투입되어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 예술 과학도시 프로젝트도 최초 예상했던 3억 유로의 약 네 배인 12억 유로가 투입되면서 예산 초과로 인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에 비해 국제 관광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1998년 예술과학단지의 첫 번째 건물 헤미스페릭 개관을 시작으로 단지가 점차 완성되면서, 발렌시아는 스페인 내 세 번째 관광 도시로 부상했다고 한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벤치와 비스듬히 서있는 기둥들이 수공간과 함께 과학과 예술을 볼 수 있는 이곳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지붕, 기둥, 슬래브, 보 등 모든 구조부재는 중력방향으로 힘을 전달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각형 건축물의 형태는 효율적으로 힘을 전달하기 위한 최적의 형태이다. 그러나 예술 과학단지 내의 모든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힘의 전달 과정을 계속해서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지탱하고 있는지, 저런 형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정말 돈이 많으면 안 되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에 유럽배낭여행을 왔을 때는 어떻게 하면 유럽여행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으로 하나라도 더 보고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정답은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여행을 하는 것이 돌이 켜봤을 때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도시의 관광지를 둘러보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고 휴양지에서 수영을 하고 가만히 누워서 책을 읽어도 좋고, 좋아하는 건축물이나 미술관 전시를 보러 가도 좋다.
세계여행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 여행지인 그라나다와 론다, 세비야에서도 와이프와 함께 여유롭게, 순간을 즐기며 여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