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와 세비야, 그리고 빌바오
마드리드-바르셀로나-마요르카-발렌시아에 이어 그라나다로 향했다. 상황이 코 앞에 다가와야 실행하는 우리지만 보지 못하면 후회할 거 같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입장 티켓은 마드리드에 있을 때부터 미리 예약을 했다.
발렌시아에서 그라나다까지, 이번에는 정해져 있는 일정 탓에 장거리 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는 길 곳곳에 우리나라 휴게소처럼 주유소와 함께 상점과 레스토랑이 함께 있어 쉬엄쉬엄 이동했다.
Laguna Salada de Torrevieja (핑크호수)
발렌시아에서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에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핑크호수를 스페인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나미비아에서 핑크호수를 보러 갔을 때도 시즌을 잘 맞춰야 핑크 빛을 잘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운 좋게 진한 핑크색을 볼 수 있는 시즌이었다.
스페인 Torrevieja 호수에 갔을 때도 핑크빛이 가장 잘 나타난다는 한여름이었다. 근처 길가에 주차를 하고 오분정도만 걸어 들어가면 핑크색 호수가 나타난다.
여의도의 약 5배 크기인 토레비에하의 분홍 호수는 사실 예전에는 지중해의 일부였다. 바다와 차단된 뒤 증발만 계속되면서 소금기가 농축되어 지금처럼 특이한 분홍빛 소금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소금을 채취하기 때문에 물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있다고 알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수영을 즐기고 있는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라나다 (Granada)
알함브라 궁전(Alhambra)
목적지나 시간을 딱 정해놓는 걸 선호하지 않았던 우리가 일찌감치 정해놓은 몇 안 되는 일정 중에 하나이다.
1984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슬람과 기독교 양식을 함께 볼 수 있는 궁전이다. 알함브라 궁전이 위치한 그라나다는 이슬람 통치 기간이 무려 약 800년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한 지역이다.
햇살 가득 스페인답게 날씨가 너무 좋았다. 울창한 초록과 눈부시고 쨍한 하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알함브라(Alhambra)는 아랍어로 “붉은 성”을 뜻한다. 해 질 무렵, 붉게 물드는 성벽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대포들도 전시되어 있어 예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흔적들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 형상이나 신의 형상 묘사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신 수학적 질서와 기하학적으로 반복되는 무늬로 장식미를 극대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표 검사 후 입구에서 여권을 맡기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릴 수 있는데 우리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어서 평점 좋은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오디오 가이드를 구매해서 들었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것과 정보를 알고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이런 유적지는 꼭 오디오 가이드를 듣게 되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테라코타 지붕과 석회암으로 만든 벽이 인상적인 알바이신지구가 내려다보인다. 유네스코유산으로 보호하고 있는 마을답게 인위적인 색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색채가 인상적이었다.
오디오 가이드 마지막에 나오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기타 선율에 소름이 돋았다. 잘 정돈된 정원을 걷고 있었는데 이곳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기타 선율이 마치 그 당시의 사람이 되어 이 정원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도록 해주었다.
매년 200만 명 이상이 방문하여 스페인 내에서도 1,2위를 다투는 관광지답게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햇살과 바람이 완벽한 날씨였고, 음악과 분위기가 추억에 젖게 해 주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전 투어를 마치고 포르투갈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다음 목적지는 세비야인데 중간에 론다라고 하는 예쁜 마을이 있어서 잠깐 들르기로 했다.
론다 (Ronda)
론다(Rond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말라가(Málaga) 주에 위치한 산악 도시로 협곡 위의 도시로 불릴 만큼 독특한 지형과 낭만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누에보 다리 (Puente Nuevo)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다. 깊이 약 100m의 타호 협곡(El Tajo Gorge) 위에 걸린 석조 다리인데 18세기에 완공되었고, 협곡 양쪽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고 있다. 다리 아래로는 과달레빈 강(Río Guadalevín)이 흐르고, 절벽 위에는 하얀 집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마을을 걸어 다니면서 투어를 했는데 작지만 관광객들이 많아 레스토랑이나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많이 활성화가 되어있었다. 절벽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하고 싶었는데 만석이었다.
론다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도 있는데 매년 9월 초에 전통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지금은 내부 시설 문제로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다리 위에서 보는 것도 멋있지만 차를 타고 비포장 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면 협곡사이에서 누에보 다리를 관찰할 수 있는 멋진 뷰포인트가 나온다.
세비야 (Sevilla)
스페인 남부 여행의 마지막 도시이자 플라맹코의 본고장 세비야에 도착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이슬람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섞인 예술의 도시이다.
세비야 대성당 (Catedral de Sevilla)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세비야 대성당이다. 바티칸의 세인트 피터 대성당과 이탈리아 밀라노의 두오모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의 성당이라고 한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섬세한 고딕 아치와 기둥이 커다란 공간을 더욱 위엄 있고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과는 다르게 내부 장식들과 조각들의 연식이 느껴졌다.
세비야 대성당에는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세계여행 대선배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석관이 있었다. 네 명의 사람이 석관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스토리가 있다. 그중 하나는 콜럼버스가 방문하고 탐험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4개 대륙을 뜻한다는 설이고 또 한 가지는 스페인 역사상 중요한 4개 왕국(Castile, Aragon, León, Navarre)을 상징하는 왕들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다.
내가 가장 공감이 갔던 이야기는 정면의 얼굴을 들고 있는 왕 두 명은 콜럼버스를 지지했던 왕이고 뒷열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왕은 콜럼버스의 탐험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왕들이라는 설이다.
진짜 뒷열의 두 명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지막 설이 더 와닿았다.
포르투갈 북부나 이탈리아 출신이 유력한 콜럼버스는 스페인령이었던 쿠바 등 여러 곳에 안치되어 있다가 결국 세비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본인을 비판하고 압송한 적도 있는 스페인 왕실의 배신감에 스페인 땅에는 묻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 때문에 땅에 묻히지 않고 석관이 공중에 띄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2024년에는 후손들과의 유전자 검사를 마친 결과 실제 콜럼버스의 유해가 저 관속에 있다고 해서 더욱 신기했다.
내부를 둘러보고 히랄다 탑으로 올라갔다. 원래 이슬람 사원의 뾰족한 첨탑인 미나렛이었는데 지금은 종탑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던 이곳은 높이 97.5m로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이루어져 있어 말이나 사람도 올라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 꼭대기에서 세비야 전경과 과달키비르 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카사 데 라 메모리아 (Casa de la Memoria)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발달한 예술 양식인 플라멩코는 노래(Cante), 춤(Baile), 기타 연주(Toque) 세 요소가 어우러진 공연이다.
플라멩코 박물관과 함께 공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보러 갔다. 오래된 저택을 활용하여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객석과 무대가 아주 가까워서 훨씬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댄서들의 거친 호흡과 정열적인 춤을 추면서 흘리는 땀방울까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공연이었다. 후기를 보고 중간자리에 앉았는데 가장 가까운 자리는 진짜 땀이 튈 것 같은 거리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자료가 없는데 한 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공연이었다.
메트로폴 파라솔 (Metropol Parasol)
세비야 구시가지 중심, 라 엔카르나시온(La Encarnación) 광장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큰 목구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6개의 거대한 버섯 모양 구조물이 광장을 덮고 있는 모습이라서 Las Setas(버섯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세비야처럼 중세와 이슬람 건축이 강하게 남아있는 도시에서, 21세 기적 랜드마크를 만들려는 시도로 만들어졌는데, 같은 의도로 만들어진 많은 건축물이 그랬듯 초기에는 전통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독일 건축가 위르겐 마이어(Jürgen Mayer)가 설계한 이 건물은 2011년에 완공되었다. 강한 햇빛과 겨울철에 비가 제법 오는 환경에서 내구성에 대한 의심이 들었는데 특수코팅된 집성목으로 만들어졌고, 모듈화 되어있어 교체가 가능한 구조라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에도 큰 무리 없이 도시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었다.
표를 구매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갈 수 있는데 좀 더 가까이 구조를 볼 수도 있고, 조금 낮지만 세비야 시내를 바라볼 수도 있는 전망대가 있다.
돌아다니기 너무 뜨거워서 옥상에 비치된 우산 겸 양산을 들고 옥상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돌며 세비야 구시가지를 돌아보았다.
오래된 시장과 주차장이 있던 공간을, 지하의 고고학 유적(로마/무어)을 보존하고, 그 위에 초현대적 건축물을 올려서 세비야의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상징을 만들고자 한 건축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어서 감명 깊었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ña)
배우 김태희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며 광고를 찍었던 곳으로 유명한 세비야 스페인 광장에 왔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분수가 있었고 주위를 따라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1928년에 지어진, 광장을 둘러싼 반원형 건물은 스페인의 옛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두 팔 벌린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무리 햇살 가득이었지만 사람들이 벽 쪽에만 몰려 있어서 의아했는데 건축물 벽에는 스페인 각 지방(48개 주)을 대표하는 타일 벤치(azulejos)가 늘어서 있었다. 여행객들이 자기 고향 주 앞에서 사진 찍는 게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고 한다.
화려한 타일장식과 철제 난간, 조각들이 세비야 특유의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회랑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낮에는 햇빛이 너무 강해 아침이나 해 질 녘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세비야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역사와 문화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어서 하루하루가 밀도 있게 지나갔다. 세비야 대성당 같은 오래된 명소는 물론, 메트로폴 파라솔 같은 현대 건축물까지 대비가 뚜렷해 흥미로웠다.
낮에는 강한 햇볕 때문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 골목길에 앉아 타파스에 맥주 한 잔 하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플라멩코 공연은 확실히 세비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빌바오 (Bilbao)
시간의 흐름순서가 아닌 국가별 제목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르투갈 이후 일정인 빌바오 여행기도 추가한다.
늦은 밤에 도착한 빌바오에서의 딱 한 가지 목적은, 바로 빌바오 구겐하임이었다. 구겐하임 바로 앞에 위치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불 꺼진 구겐하임을 바라보니 내일이 더욱 기대되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Guggenheim Museum Bilbao)
한때 철강·조선업으로 번성했으나 1970~80년대 산업 쇠퇴로 침체된 빌바오를 되살리기 위해 추진된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핵심인 빌바오 구겐하임에 왔다. 1997년에 완공된 빌바오 구겐하임은 현대 건축과 도시 재생이 결합된 대표 사례로 전 세계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례다.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건축 작품이자 도시 랜드마크인 것이다.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을 한 후 바로 옆 구겐하임으로 이동했다. 뉴욕에서 방문했던 구겐하임과 마찬가지로 구겐하임 재단(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소속으로, 같은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앞서 미국 편에서 소개한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마찬가지로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하였다. 프랑크게리의 특징인 유기적인 형태와 금속 패널로 마감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책에서만 보던 건축물을 직접 마주하는 기분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설렌다.
건축가의 의도대로 물 위에 떠있는 배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하다. 약 3만 3천 여장의 금속패널은 다채로운 형태의 매스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내부에 들어서면 커다란 아트리움 공간이 나온다. 높이 약 50m의 탁 트인 공간으로, 미술관 내부의 중심 역할을 한다. 거대한 유리 천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나선형 계단과 유리 엘리베이터, 보행 다리가 교차하면서 역동성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빌바오 구겐하임은 그동안 보았던 벽은 하얗고, 빛은 균일하며, 작품만이 집중되는 환경을 만들었던 미술관과는 완전히 차별되는 곳이었다. 공간은 배경일뿐이고 작품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당연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건물 전체를 조각 같은 전시품으로 만들어 공간과 함께 경험하도록 만든 실험적인 미술관이었다.
작품 감상을 단순히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일이 아니라, 공간 전체와의 상호작용되도록 의도했다고 한다.
마치 협곡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눈에 띄었는데, 같은 공간인데도 내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내부 전시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고 건물 내부를 구경하느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입장했던 입구의 반대편인 강변 공원 쪽으로 나왔다.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시민들과 관광객이 자유롭게 다가가 사진 찍고 즐길 수 있는 개방형 전시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입구 쪽에 들어오면서 봤던 꽃으로 장식된 커다란 강아지도 1997년, 미술관의 개관 때부터 자리를 지킨 사실상 빌바오 구겐하임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라고 한다. 계절마다 꽃장식을 바꾼다고 하는데 사실 강아지인지 글을 쓰며 알았다. 곰인 줄 알았다.
총세편의 스페인 여행이 끝났다. 마드리드부터 빌바오까지 어느 도시하나 놓칠 수 없었던 따뜻한 여행이었다.
뒤늦은 여름휴가로 태국을 다녀오는 바람에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이 밀려서 빨리 써야겠다’라는 마음보다 ‘밀린 김에 좀 더 ’라는 마음이 더 커서 게을러졌다.
다시 부지런히 여행을 계속해야겠다. 다음 여행지는 이번 세계여행에서 가장 낭만적이었던 포르투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