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역사와 미래, 새로운 세계질서
이 책은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이해하고, 미래의 세계질서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측해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는 서로 다른 문명들 간의 경쟁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존재하는 문명은 대략적으로 7-8가지 정도가 있는데, 인도 문명, 중화 문명, 일본 문명, 아프리카 문명, 서구 문명, 이슬람 문명, 라틴아메리카 문명, 러시아 정교 문명이다. 문명을 나누는 기준은 학자마다 달라서 그 갯수와 종류에 편차가 있지만, 적어도 서구 문명, 이슬람 문명, 중화 문명을 부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문명의 핵심 요소는 종교이다. 중화 문명은 유교, 인도 문명은 힌두고, 서구 문명은 기독교, 이슬람 문명은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특히 이슬람 문명의 경우에는 다른 문명과의 관계에서 종교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에는 미국의 자유주의가 승리했고,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 질서가 자유주의 이념을 따를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헌팅턴(책의 저자)의 입장으로는, 그동안 냉전 체제 아래에 가려져있던 문명 간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 갈등에서 서양은 더 이상 절대적 우위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20세기 동안 서양의 힘이 점차 쇠퇴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 군사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의 호전성도 서양을 견제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대목인데, 최근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이 있어서이다. 만약 문명 간의 충돌로 세계를 이해한다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문명권에 속해 있으므로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영향이 강한 동부와, 서구 문명의 영향이 강한 서부로 나뉘어 있고, 그 중에 누가 지배권을 갖느냐에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관계가 바뀔 수 있다. 헌팅턴의 예측과 달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가 틀렸다는 것일까? 적어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전쟁의 명분이 이념에 있지 않고 민족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는 독립된 민족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는 다른 문명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서양의 여론은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이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 문명과 서구 문명이 대립하는 양상을 띤다.
또한 이 책에서는, 근대화와 서구화를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 국가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민주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같은 서구 문명의 가치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이 산업화를 이루고 발전하면서, 또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유럽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중국은 그들의 고유한 문화에 점점 더 자신감을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
헌팅턴이 서구 문명의 상대성을 인정한 것은 그가 일종의 문화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서구 문명의 윤리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윤리가 상대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어느 정도의 보편적 윤리는 실재하고, 그러한 윤리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문명 간의 국제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웠던 점은, 현재의 세계 질서를 역사적인 여러 가지 사건들과 비교할 수 있게 된 점이었다. 서양에서 기원한 과학, 기술의 파급력은 물론 역사적으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그런 과학과 기술이 여전히 서양만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런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유럽,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과학 기술의 우월성이 곧 문화의 내재적 보편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강한 군사력, 경제력을 가지게 되면 그 국가의 문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다른 국가가 더 강해지면 새로운 문화가 더 보편적이 된다.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탄소년단,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의 한국 문화에 자부심을 갖게 된 것도 우리나라의 국력이 강해진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팝 음악과 영화는, 한국에 들어온지 아무리 길어도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예술가들이 외국의 음악, 영화를 많이 참고했다고 해서 우리들이 그것을 외국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문화는 원래 섞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헌팅턴이 앞으로의 세계 정세에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발전이다. 중국은 경제력, 군사력을 키워서 미국-유럽과 대립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 대립은 곧 문명 간의 충돌인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떠오른 것이, 인도가 얼마 전에 중국의 인구를 추월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인도의 인구수를 10억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놀랐었다. 인구도 잠재적 자원인 만큼, 인도 또한 강한 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헌팅턴의 예측대로 미-중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흥미로운 생각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국가 인식이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고, 또 중국에 대한 인식도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제2외국어는 중국어와 일본어이다. 그리고 외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정도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영화, 음악이 압도적이다. 인문학은 일본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고, 현재까지도 일본 문학은 가장 인기있는 외국 문학 중 하나이다. 얼마 전에 서점에 갔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의 번역본이 11종류나 있는 것을 보고 신기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가까이 있는 중국, 일본 두 강한 국가에 대한 인식보다도 멀리 떨어진 미국, 유럽에 대한 인식이 더 긍정적인 점이 생각해보니 꽤 특이한 것 같았다. 그러나 헌팅턴의 예측대로 세계 질서가 문명을 바탕으로 재편된다면, 한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에 속한 국가로서 중국,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인식이 바뀐 점은 아마도, 과학 기술과 문화를 떼어놓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인공지능 같은 기술의 관점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관점에서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게끔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기술의 전파는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었고, 한때는 중화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기술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서구 문명보다 훨씬 발전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서구 문명이 앞으로도 가장 강력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선은,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 산업화의 필수 요소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반드시 최선의 지도자를 공정하게 선출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중국이 만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미국과 유럽의 힘이 줄어든다면, 그 후에도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호소력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정치 제도는 역사의 가장 큰 진보이고, 그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별 국가들의 고유한 문화와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조화를 이룬다면 바람직할 것 같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헌팅턴은 ‘문명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예견했는데, 이 질서가 평화롭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되, 보편적 윤리의 동질성을 모색하고 심화하고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뉴스를 보니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지난번 임기 때 트럼프가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민을 줄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인데, 문명 간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문명이 갈등을 겪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트럼프처럼 그런 갈등을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서로 다른 문명끼리 공존하는 태도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